6화. 춤의 시작, 리추얼 Ritual
6화.
춤의 시작, 리추얼(Ritual)
인간이 지구에 난 이후로, 인류는 항상 창조자와 다양한 신성을 위해 춤을 춰왔다. 이것이 모든 춤의 시작은 리추얼(Ritual)이고, 신성한 이유다. 하나의 유희가 되기 전, 춤은 기도의 형식이었다. – 제르멘 아코니(Germaine Acogny), 책 ‘아프리카 춤(Danse Africaine)’ 에서
만딩고 춤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들의 ‘리추얼’에서 첫 단추를 풀어본다. ‘리추얼’을 네이버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종교적 의식’, ‘제의적 의례’, 또는 항상 규칙적으로 하는 의례적인 일이라 한다. 부르키나파소의 다가라(Dagara) 민족 치유사의 전통을 잇는 ‘말리도마(Malidoma)’는 그들 사회의 ‘리추얼’은 이 서구적 정의와 다르다고 말한다. ‘리추얼’은 ‘의식’이란 단어로 비슷하게 사용되는 ‘세레모니(Ceremony)’와도 다르며, 매일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는 상습적인 행동들, 일상의 형식들과 정확히 반대라고 했다.
‘리추얼’은 영혼의 요구를 느끼기 위해, 표현되어야 하는 감정이 무엇이든 자연스럽고 공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타인들과 함께 날것의 깊은 반응을 창조하기 위해, 경험을 통해 공동체와 조상들 영혼의 존재를 느끼기 위해, 다른 이들과 모이는 행위이다.
성인으로 인정받고, 진정한 사회 구성원이 되는 의식, ‘입문식(Initiation)’은 개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리추얼’ 중 하나였다. 10대 초중반의 나이가 되면 겪게 되는데, 그들의 입문식은 숲 속 깊이 위치한 공간에서 약 30일동안 함께 숙식하며, 불과 물, 흙과 나무 명상 등을 통해 다양한 초월적 경험을 한다. ‘너의 중심을 찾아라.’ 말리도마가 어렸을 때 직접 경험한 입문식에서 들은 말이다. ‘입문식’의 목적은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각자가 현실 세계에서 꼭 수행해야 하는 역할, 세상에 온 목적을 이해하는데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중심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중심이 있는데…(생략)… 태어나면서 자기 중심과의 교감을 상실하고,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이 중심에서 멀어진다. 이 중심은 우리 내부에도, 외부에도 있다. 중심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우리는 이 중심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발견해서, 중심과 함께 해야 한다. 중심이 없으면,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책 <아프리카에서 온 메신저, 말리도마> p351-352
그리고 ‘자신의 중심’은 이웃과 아버지, 어머니, 가족이나 조상들과 같을 수 없다고 말한다. 또, 원으로 앉아있는 ‘입문자’들에게 그들 모두가 원인 동시에, 이 원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즉, 원이 없으면 중심도 없고, 중심이 없으면 원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2016년, 2018년 부르키나파소를 여행하며 한 가지 질문이 강하게 들었었는데, 이 말리도마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해가 갔다. 한국과 같은 집단주의 문화이며, 나이와 성별에 따른 위계가 아주 강하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개개인들의 개성이 이토록 존중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나의 의문이었다. 커뮤니티의 결속력과 동시에 그 구성원들의 ‘유니크함’도 아주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춤은 말할것도 없고. 내가 이해하고 겪은 한국사회는 집단을 잘 유지하기 위해선, 각자가 ‘평균’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 ‘튀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나의 지난 날들이 떠오른다. 나에게 ‘사회화’는 사회의 기준에 맞춰 내 ‘개성’의 일부를 삭제하고 수정하는 행위였다.
‘개성’과 ‘공동체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에, 말리도마는 ‘개인성’과 ‘개인주의’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대체불가능한’ 개개인의 독특한 개성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했다. 각 개인의 재능이 꽃을 피우고, 즉 각자가 ‘자신의 중심’을 이루며 살 때, 공동체 역시 건강하고 풍요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다.
‘리추얼’은 개인과 사회를 함께 치유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한 명의 변화를 위해, 공동체 모두가 모여 정신과 의도를 집중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북을 연주했다. 다가라 사람들에게 이 단어는 ‘변형하는, 필수적인, 도전하는, 또는 치유하는’ 과 같은 형용사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삶의 역동성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단어들처럼, ‘리추얼’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뻔히 알아 쉽게 지루해지는 ‘세레모니’와 다르게 (전형적인 의례의 식순을 떠올려보자 1. 국기에 대한 경례 2. 인사말. 3 인사말…), ‘예측불가능하고, 계획되지 않고, 순서 역시 뒤죽박죽인 시간’이다. 무엇이 진행되는지 알 수 없는 이 빈틈많은 시공간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더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리추얼’은 공동체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그는 강조했다.
‘리추얼’을 이끄는 건, ‘예술적 재능’을 가진자들이 맡았다. ‘예술적 재능’이란 ‘치유하는 힘’을 뜻했다. 말리도마는 사실 ‘예술’이라는 말은 다가라 언어에 존재하지 않으며, 예술과 가장 가까운 말을 찾는다면 그건 바로 ‘신성한(Sacred)’이란 단어일 것이라 했다. ‘예술가’는 ‘신성한 힘’을 다루는 장인으로서, 현실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연결짓는 ‘치유자’였다. 그리고 사회에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만드는 ‘공동체의 심장’, 영적인 갈증을 해소해주는 ‘정신적인 분수(spiritual fountain)’같은 존재였다.
치유를 위한 ‘신성한 춤’은 아프리카 춤에서 보통 연상되는 ‘자유로움’과 거리가 멀다. 현대의 고등 교육보다 몇배 더 엄격한 수준으로 전수되고, 작은 것 하나라도 아주 정확하게 수행해야 하는 춤이다. 손 끝 하나라도 다르게 추면, 자칫 생명이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반대편, 예술적 재능과 관계없이 모두를 위해 열린 ‘춤’ 역시 존재했다. 만딩고 사회에선 왕도, 거지도, 아이도, 노인도 모두 춤추는 존재였다. 당신이 걸을 줄 안다면 춤출 수 있다는 그들의 오래된 속담과 같이, 춤은 일상적인 움직임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다음 화에서는 일상적인 노동의 동작들이 춤이 된 이야기에 대해 더 알아본다!
ps.
리추얼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처음 2014년 만딩고 춤 워크숍을 열 때, 엠마누엘에게 ‘만딩고 댄스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Purify our body and mind. 내 몸과 마음을 정화한다”라고 답했다. ‘에너지’, 또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렸던 내게, ‘Purify(정화하다)’라는 단어는 꽤 낯설었던 기억이 있다. 엠마누엘이 스트레칭을 끝내고, 춤추던 이들 모두를 잠재우며, 땅에 대한 시를 읊는 시간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이 춤은 단순히 ‘즐거움’, ‘운동’, ‘친목’도 아닌 또 다른 힘이 있다고 느꼈는데, 매주 우리는 작은 ‘리추얼’을 끊임없이 이어오고 있는 게 아닐까.
<참고도서>
아프리카에서 온 메신저, 말리도마 (2006)
The healing wisdom of Africa – Finding life purpose through nature, ritual and community (Malidoma Patrice Some, 1998)
Danse Africaine (Germaine Acogny,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