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안녕하세요, 엄마가 되었습니다 – 재난의 시대를 맞이한 우리들의 춤
6월의 어느 날, 몿진 회의 중 나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번 재난 코너 말이야. 나 요즘 그리 새롭게 진행하고 있는 일이 없어. 쿨레칸 프로듀서 일은… 태업 중이야. 하하하”하고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이 코너는 코로나 상황 속 무용팀 기획자로 일하며 겪는 나의 경험을 조금 자유로운 형식으로 풀어놓는 곳이다. 그러자 보코가 있는 그대로 현재 펼쳐지고 있는 현실을 써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했다. 지금 느끼는 불안감도, 고민도 모두.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로 임신 27주 차. 배 속에 아기가 자라기 시작한지 약 7개월이 되었다. 출산예정일은 가장 바쁜 달인 9월 말이다. 가을과 겨울을 염두에 둔 프로젝트는 실상 열심히 뛰어들 수 없게 되며, 새로운 일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게 부끄럽지만, 내게 찾아온 이 생명을 아낌없이 보살피고 싶은 마음 또한 존재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기도 하다.
기획일을 하는 내게 일 년의 시간은 농사꾼처럼 흐른다. 공연과 축제가 많은 계절을 주기로 마치 농번기와 농한기처럼 구분되는 것이다. 하지만 임산부의 시간은 훨씬 더 촘촘하게 주 단위로 세어진다. 주 단위로 셀만큼 몸의 변화는 빠르다. 그만큼 아기도 쑥쑥 변화한다는 뜻이다. 병원 검진 가는 날이 내 생활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라는 말만큼 좋은 말이 없다. 콩알만한 게 어느새 자라나 벌써 사십센치에 육박하고, 무게도 1키로나 되다니. 나보다 두 배로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진 이 작은 생명과 나는 내가 먹는 것을 함께 나눠먹는다. 그래서 지금은 그 모든 것보다 내 몸에 우선순위를 둔다.
올해 2월, 프로젝트와 일들이 몰아치는 가운데 아기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서울과 지방을 일주일간 매일 차로 오가기도 하고, 반년 동안 준비한 프로젝트의 대장정을 마무리짓는 강행군이었다. 임신테스트기로 두 개의 선을 보며, 이 속에서 살아남았다면 너는 꽤 튼튼한 짜식이군! 생각했다. 지난 여름, 극심한 스트레스와 함께 7주 차의 조그만 세포를 잃었던 적이 있는 나는 이번엔 생각보다 담담했다. 하지만 과거가 된 그 기억은 꽤 질기도록 나를 쫓아왔다. 심장 소리를 기대했지만, 첫날 찍은 초음파 사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이던 사진, 수술 전날 새벽 갈고리로 말라비틀어진 호박을 긁듯 속을 갈갈이 긁는 듯한 통증 등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무도 나의 잘못이라 말하지 않았지만, 모든 일이 내 몸에서 일어났고, 꽤 오랫동안 자책감에 괴로웠다.
첫 초음파 검진에서 세포는 자라나 이미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는 조그만 생명체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팀원들과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나는 3개월간의 꽤 긴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임신 초기에 유산 위험도 크고, 한번 유산 경험이 있는 여성은 다시 겪는 것도 쉬워 주변 동료들은 이 상황을 모두 적극적으로 배려해주었다. 바깥 활동을 최대한 줄이고, 코로나에 걸맞은 집콕 생활이 시작됐다. 읽고 싶었던 책들을 실컷 읽으며 오랜만에 찾아온 방학같은 기분을 즐기기도 하고, 가족 외 다른 사람을 만나기가 손꼽는 일이 되며 몇 가지의 상실과 외로움들이 떠오르는 시간이기도 했다. 또, 불규칙한 생활 패턴에서 살림이란 밀린 숙제와 같았는데, 집을 돌보며 리듬을 가다듬는 일에 점점 적응한 시간이기도 하다.
임신 이후에 겪는 나의 몸은 참 낯설었다. 초기엔 이렇게 졸릴 수 있는가하며 매일 쇼파에 쓰러져 잠들곤 했다. 점차 아랫배와 가슴이 땅땅해지고, 비염이 극심해지며 혼잣말을 해댈 만큼 개꿈도 많이 꿨다. 임산부는 무거운 짐을 들지 말라더니, 들고 나면 허리가 욱씬하고 몸이 예전같지 않다. 임산부라면 정상적인 이 둥그렇게 튀어나온 배가 처음엔 살이 갑자기 찐 것같이 못나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자다가 종아리에 쥐가 나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자동차를 타기 겁날 만큼 1시간 마다 화장실을 찾는다. 자궁이 갈비뼈까지 올라와 숨쉬기가 힘들다더니, 진짜 옆구리 스트레칭을 하는데 전에 없던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안정기에 접어들어 옳다구나 춤추러 갔는데, 춤추고 나면 골반이 한없이 밑으로 쑥쑥 빠지는 것 같은 통증에 눈물을 머금고 그만두었다. 나이키 임산부 광고 속 격렬한 스포츠활동을 하는 여성들을 보며 로망을 품었는데, 역시 계속 움직여 왔던 이만 가능한 것이었나 보다. 예전처럼 업무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는다. 눈빛이 초롱해지고 머릿속에 섬광이 일듯 총명했던 순간이 가물가물해진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하기보다,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된다. 음식을 만들고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일은 예전보다 귀찮거나 힘들지 않다.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온갖 제철 요리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머릿속에 새로운 통로가 생긴 건가.
임신을 한 몸은 꽤 크게 내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젠 가만히 서 있는 동안에도 불쑥 아기의 발차기가 느껴지는데, 배에 손을 대며 말을 걸면 가끔 그 자리에 통! 하고 작은 물결이 인다.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다. 생명이 몸속에서 자라나는 동안 내 몸을 돌보며 얻게 되는 감각은 나에게 새로운 행동들을 가르친다. 사실 아이를 갖고 키우는 일은 오랫동안 내 안에 숨쉬고 있던 욕망 중 하나였다. 어머니라는 세계는 항상 궁금하고, 또 이해하고 싶었다. 머리가 굵어질수록 ‘좋은 어머니’되기란 얼마나 많은 함정들을 헤치고 지나가야 하는가 고민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너는 현모양처감이다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에서 거친 분노가 일었던 때가 있다. 페미니즘 소모임에서 읽은 책 ‘어머니의 탄생’은 ‘모성’을 여성에게 강요하도록 기획된 남성 과학자들의 기존 연구를 비판했다. 아무리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어도 뜬구름같은 이야기였는데 지금 나는 조금씩 엄마의 세계로 발딛어가는 나를 보게 된다. 나의 행위가 내 몸속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좀 더 내 행동에 책임을 지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부터 매일 마시는 공기와 버리는 쓰레기 등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전보다 세심히 챙기게 된다. 새삼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누군가의 뱃속에서 열 달을 귀하게 보내고,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몇 년을 누군가의 돌봄과 보호로 지금까지 살아남았구나 생각한다. 작고 약한 것을 길러내는 모든 생물들에게 경외감이 들기도 한다.
나는 매번 다가올 미래를 계획하는 일을 해서 그런지 앞날을 앞당겨 생각해 걱정이 많은 편이고, 반면 남편은 나와 다르게 지금 일이 벌어지는 현재에 집중해 결정한다. 앞날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지금의 상황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것이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춤’을 춰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하며 홀로 피식 웃어보곤 한다. 코로나 상황 속 경제활동이 더 불안해진 지금, 아이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과 그와 함께 돈을 벌어야 하는 시간 셈이 잘 되지 않는다. 출산과 양육의 공백으로 재취업이 쉽지 않았다는 친구들의 사연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까지 일하며 쌓아온 네트워크와 프로젝트들, 원래의 물줄기 속으로 잘 합류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새로운 물줄기로 흘러가게 될까.
이렇게 고민하다가도 지금 이 시기를 최대한 잘 보내고 싶다는 욕심도 든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을 위해서. 두려우면서도 또 많은 것을 배울거고, 그 속에서 보석같은 순간을 발견할 수 있을거야 하고 나를 북돋아본다. 새롭게 배운 경험으로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긴 임신 기간 동안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건 이 글쓰기라는 걸 잊지 않으면서. 일하기는 참 싫었지만, 몿진의 글을 쓰는 일은 지치지 않고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던 일이었다. 다음 호가 어떻게 이어질지 예측할 수 없지만, 오늘 이 글에 최선을 다해 마침표를 찍는다.
별님
3 years ago맑고 아름다운 영혼이 깃든 글 입니다. 소영 님의 순산을 기원합니다!
만끽
3 years ago와… 진솔한 이야기 들려주어 고마워요..!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뭔가 세세한 글과 기분에도 저도 함께있는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축하해요~!!
진도리
3 years ago소영! 오랜만에 정독한 글이었어요!!!
너무 보고싶고 항상 응원해! 모모 너무 만나고 싶다고 전해줘영~!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