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신세계 – 우리 몸 관찰일기
2화. 신세계
내 손으로 먹을 거야. 주는 대로 잠자코 먹던 아기가 성장한 순간이다. 숟가락을 굳게 다문 입으로 밀어내고, 내가 쥔 숟가락을 대신 꽉 붙잡는다. 숟갈을 빼앗아 질겅질겅 씹는 품새가 꽤 그럴싸하다. 곰돌이 푸 얼굴의 실리콘 접시로 손가락을 뻗는다. 뭉근하게 찐 고구마를 한주먹에 꽈악 쥔다. 주먹 위아래로 고구마 덩이가 주욱 삐져나온다. 느릿느릿 입으로 옮겨 가기 시작하는데, 고구마가 떨어질락 말락 아슬아슬하다가 결국 톡. 찐득한 손바닥을 이마부터 코, 턱까지 주르륵 비벼 내려온다. 와우. 이것이 바로 8개월 아기의 혼자 먹기 세계!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말은 아기를 키우며 생겨난 말인가 보다. 이도 안 난 입으로 제법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씹어 먹는데, 며칠 전엔 수박을 아주 맛있게 먹더랬다. 한 손에 쏙 들어가는 빨간 조각을 주먹으로 꽉 으스러뜨리니, 분홍 물이 손목을 타고 팔꿈치로 주르륵 흐른다. 그리곤 입에 넣고 사그작 사그작. 다시 한번 입안에 가득 찬 단물이 목으로 주르륵 흘러내린다.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아기가 수박 먹는 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지금 아기에게 맛을 보는 행위란 입만 움직이는 게 아닐 세다. 손으로 얼굴로 온갖 감각을 동원해 맛을 보는데, 생생히 맛볼수록 씻기는 사람의 몫은 점점 커지고 마는데… 아기가 스스로 먹으며 겪는 실패와 성공 경험은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고 하니, 한 발자국 떨어져 혼자 빙긋 지켜본다. 아기는 자신의 모험을 조금씩 시작하고 있다. 그래, 무엇이든 지금처럼 거침없이 손을 뻗고, 실패도 성공도 마구 부딪쳐 보렴. 내가 항상 한 발자국 옆에서 보고 있을게! 사랑한다! (하고 순간순간 다짐하듯 말하는 게 양육자의 일상)
아기를 응원하는 마음은 언제나 시원하게 일으켜지나, 스스로를 북돋는 일은 그리 쉽진 않은 거 같다. 속으로 여러 번 타협하고 포기하던 차, 이번 달엔 나도 새로운 도전을 많이 했다. 동네 육아 모임과 수영, 그리고 월경컵. 모두 정기적인 이벤트라 하루살이 육아 생활에 새로운 리듬감을 불어 넣고 있다.
하지만 시작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막상 맞닥뜨리면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는데, 나는 매번 시동을 거는 데 오래 걸린다. 우리 댄스 워크숍에 오는 사람들 중에도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여기 춤추러 오려고 마음먹기는 오래전에 했는데, 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더라고요 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몇 년을 참여자분들께 용기를 불어넣고, 춤을 꽤 오래 췄어도, 소심한 내 마음은 사실 크게 변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하지만 춤추며 조금 달라진 게 있는데, 그건 몸이 내게 하는 말을 좀 더 잘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월경컵. 오래전부터 주변 친구들이 신세계라고 추천했지만, 탐폰을 잘 못 써 아팠던 기억이 강해서 두려움이 컸다. 아기를 낳은 후에는 회음부 생각만 해도 아래가 찌릿찌릿한 것 같아 월경컵에 손이 쉽게 가지 않았다. 물론 월경컵은 질 속으로 넣는 거지만, 몸에 남아있는 꺼림칙한 느낌이 오래 갔다. 수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월경이 시작됐고, 우연히 동네 제로웨이스트 가게에서 월경컵 이벤트를 진행해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내 몸을 사랑하자 오래도록 되뇌었지만 출렁거리는 뱃살은 둘째 치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월경은 정말 좋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딸을 낳은 지금, 나는 더 늦기 전에 내 몸을 받아들이고, 딸에게 나보단 좋은 경험을 갖게 해주고프다. 두 손가락을 힘주어 작게 오므린 컵을 밀어 넣는데, 어라, 생각보다 크게 어렵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이게 뭐라고 여태껏!
수영도 오랜만에 신세계였다. 십 킬로에 육박한 아기를 매일 들었다 내리며 느꼈던 중력에서 해방된 느낌이랄까. 물속에 둥둥 뜬 기분이 너무나 상쾌했다. 초급반 첫날, 키판 잡고 발차며 앞으로 가는데 나는 생각보다 발차기 에이스였고, 젊은 남자가 날 보며 어쩜 체력이 이리 좋으시냐 혀를 내두르자 나는 우쭐했다. 세상에 육아로 체력이 단련됐나봐. 그러다 자유형 숨쉬기로 들어가는데, 세상에 숨 세 번 만에 어찌나 숨 막히던지. 매우 느리지만 격렬하게 질주하며, 도망간 체력 붙잡기에 오기가 붙었다.
신기한 것은 수영은 매번 할 때마다 조금씩 쉬워졌다. 저번에 안 되던 것이 오늘은 되고, 숨은 참기만 했는데 어느새 내뿜고 있고. 수영에서도 ‘힘 빼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키판은 내게 생명줄이라 힘을 빼기는커녕 꽉 끌어안고 발버둥에 가까운 헤엄을 치는 나였다. 키판을 안고 배영을 하던 어느 날, 턱을 끌어당기고 배를 들어 올리며 힘을 나도 모르게 뺀 아주 찰나의 순간, 깃털처럼 산뜻한 느낌의 물살이 쑥 내 몸을 스쳐 지나갔다. 아, 이거다. 계속하다 보면 몸이 결국엔 알게 되는 것. 내 몸은 예상보다 빨리 배웠고, 짧은 순간이지만 그 쾌감의 여운은 길었다. 숨이 터질 것 같이 헤엄치다 벌게진 얼굴로 도착해 숨을 헉헉 몰아쉬는 순간이 나는 요즘 제일 좋다. 지금 내겐 최고의 휴식. 내 몸으로 얻은 이 쾌감을 더 자주 맛보고 싶다.
아기를 낳고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동네 육아 모임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처음엔 가기가 좀 내키지 않았다. 아기 데리고 밖에 몇 시간 있는 것이 장거리 여행처럼 부담스러웠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마음이 탁 당겨지지 않았다. 시장, 공원, 카페, 도서관, 은행. 아기와 함께 가볼 수 있는 곳들이 어디까지일지 계속 시도해보며 어느 정도 내 몸과 마음이 적응하게 되었을 때, 이제는 육아 모임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혼자 주리를 틀며 용쓰던 시간을 끝내고, 이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때다!
아기는 마을이 키운다는 건 정말 맞는 말이었다. 아기는 존재만으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환하게 이어주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 품에 안겨, 여러 사람의 품을 옮겨가며 놀았다. 돌보는 눈길과 손길이 릴레이처럼 이어지는 몸들 속에서 나의 긴장은 절로 풀어졌다. 아기와 함께 있는 몸으로 나는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낯선 사람들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구나 깨달았다. 지금까지 얼마나 마음 졸이고, 숨을 참았던가. 아기들은 갑자기 일어나고, 소리 내고, 넘어졌다. 이 모든 것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육아 경력은 대단한 경력이었다. 숙련자들은 각종 돌발상황에 여유롭게 대응하며 별일이 아닌 일들로 만들었다. 이들 속에서 아기는 누구 하나의 아기가 아니라 여기 모두의 아기였다. 오랜만에 만난 안전한 공동체가 무척 반가웠다.
며칠 전 아기와 함께 간 몿진 인터뷰는 아기를 달래느라 절반도 되지 않는 집중력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동료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었고, 또 그에게 많이 기대었다. 개인적으로는 ‘실패’로 남은 경험이지만, ‘실패’를 해볼 수 있어 고마운 시간이었다. 이 실패를 기꺼이 안아준 동료와 인터뷰이 분들께도 부끄럽지만 감사하다. 일기를 쓰며 나의 의지도 성장 중에 있구나 알게 되었다. 어디까지 아기와 함께 가능할까 새로운 세계를 계속 탐험해보고 싶다.
글 : 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