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_침묵하지 않는 춤 ⑩] 페미플로어 – “무엇이 없다면 괜찮아질까”
인터뷰 시리즈
[침묵하지 않는 춤 – 페미니즘으로 본 춤의 세계]
다양한 예술 영역에서 페미니즘적 관점과 사유가 확장되고 있다. 퀴어/여성 서사에 주목하는 문학, 페미니즘 연극제, 여성주의로 읽는 미술사 등 위계와 차별에 맞선 창작과 기록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는 끝없이 이어진 문화예술계 미투, 성폭력과 가부장적 폐습을 지적하고 성찰을 요구해온 목소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몸이 주요한 매체이자, 곧 주체이기도 한 춤의 세계는 어떨까? ‘페미니즘으로 본 춤의 세계’라는 부제를 단 이 인터뷰 시리즈에서는 성별, 장애, 나이, 외모, 성 정체성, 건강 상태, 사회적 신분 등과 관계없이 차이를 차별로 인식하지 않는 실천 윤리인 페미니즘을 중심에 두고 지금, 오늘의 춤을 살펴본다. ‘침묵하지 않는 춤’은 무용 담론에서 벌어져 왔던 위계와 배제의 구조를 확인하고, 수행적인 예술로서 춤추기를 멈추지 않은 이들에 관한 기록이다.
무엇이 없다면 괜찮아질까1
우리가 속한 시공간이 어제보다 약간은 더 근사해지고, 춤추는 몸들이 마주치는 세계가 오늘보다 조금은 더 나아지기 위해 사라져야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단절하고 싶은 과거와 앞당기고 싶은 미래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그 사이를 영유하는 몸들과 움직임은 과연 무엇을 빚어낼까. 무언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예술을 추동하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무용가들이 모인 여성주의 공동체인 ‘페미플로어(femifloor)’는 2022년 ‘____’가 없는 미래의 무용을 상상하는 장을 열었다. 일명 ‘((없는 무용))’ 프로젝트. 페미플로어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혜영, 유지영, 이민진, 윤상은 무용가는 괄호 안에 각각 ‘유감’, ‘착취’, ‘폭력’, ‘위계’라는 단어를 넣었다. 이것들의 부재를 상상하는 동안 ‘몸을 둘러싼 고착화된 규범’이 부딪치고 마모되고 교차하며 한 뼘 넓어진 것이 있다면 무엇일지, 페미플로어를 만나 물었다.
이민진 페미플로어의 네 사람은 좁은 무용계 안에서도 서로 겹치는 영역이 크지 않다. 각자 활동하는 영역이 조금씩 다른데, 나에게 페미플로어는 일종의 대나무숲 같은 곳이다. 서로 작업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문제의식을 나눌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다. 나름의 현안과 상황을 공유하며 네트워크의 역할이 되어주고 있다.
윤상은 무용계 내에서 페미니스트를 자기 정체성으로 가져가는 이가 많지 않다 보니 상대적으로 페미플로어가 무용계 내의 페미니스트 그룹으로 인식되는 측면이 크다. 때때로 우리가 더욱 명시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유지영 혼자서는 아무리 강하게 이야기해도, 무용계의 목소리로 여겨지지 않고 묻히기도 한다. 우리가 가진 생각을 가시화하고, 무용계 안에서 이런 고민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페미플로어의 활동이 의미 있게 느껴진다.
페미플로어는 2019년 3월, 무용계 내의 페미니즘을 고민하며 알음알음으로 연결된 이들의 스터디 그룹으로 시작됐다. ‘페미플로어(femifloor)’라는 이름은 페미니즘(feminism)과 ‘춤을 추는 데 적합한 기능을 하는 공간’인 ‘댄스 플로어(dance floor)’의 합성어이다. 2019년은 문화예술계의 #미투 국면이 확산하던 시기였다. 여러 장르에서 #미투가 연달아 터졌지만, 무용계는 한동안 잠잠했다. 무용이라는 예술 영역 안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던 이들이 페미플로어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윤상은 당시 나는 다른 페미니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예술계 #미투를 바라보며, 무용계 안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는 단체나 연대 활동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어떻게 사람을 모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SNS를 통해 이민진 무용가가 올린 페미니즘 관련 포스팅을 보고 느닷없이 메시지를 보내게 되었다.
이민진 윤상은 무용가가 블로그에 초연 작품의 프리뷰를 써주셔서 알고 있었다. 당시 갓 졸업한 직후라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학부 때부터 소위 말하는 ‘프로 불편러’였는데 항상 문제적인 상황이 눈에 먼저 들어오고 불편함을 감지하고 있던 때였다. 이와 관련해 종종 이야기 나누는 주혜영 무용가가 가까이 있었고, 유지영 무용가는 당시 무용계의 부당한 관례와 관련해 싸운 경험이 있던 이로 기억한다.
유지영 페미플로어가 결성된 2019년보다 훨씬 이전의 일인데, 졸업 직후 열심히 지원서를 쓰던 시기였다. 어느 극장에서 운영하는 댄스 페스티벌에 공연이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참가비를 내고,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왜 안무가가 공연을 올리기 위해 돈을 내야 하는지 항의했더니, 이건 관행상 당연한 거고 티켓을 팔아 수익을 내면 되지 않냐는 답이 돌아왔다. 분노해서 참여하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그 상황을 SNS에 세세하게 썼다. 그 글이 공유가 많아지면서 관련 기관과 연루된 교수로부터 글을 내리라는 종용을 받았다. 결국 글은 내리지 않았지만, 사안은 그냥 흐지부지 흘러갔다.
이민진 그 사건을 통해 유지영 무용가를 알게 됐다. 유지영 무용가의 글은 정확하게 얼마를 요구했는지, 금액과 실명을 뭉뚱그리지 않고 단호하게 공개하고 있었다. 그렇게 속 시원한 글은 처음 봤다. 나도 학부생일 때, 특히 교수로부터 ‘민진이는 맨날 SNS에 이상한 거 올리는 애’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기 때문에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
윤상은 함께 모여 나눈 경험이 유사했다. SNS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거나 가령,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글을 게시하면 내리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젊은 여자애가 무슨 발언을 한다고, 같은 말. 페미플로어라는 이름으로 모였을 때,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위계적인 문화가 부당하다는 문제의식을 안고 있었다.
서로의 경험과 고민을 나누던 중 2019년 6월 유명 무용수의 위력에 의한 성추행 사건인, 무용계 미투가 터졌다. 페미플로어는 무용계 내의 특수한 성폭력 구조를 공론화하기 위해 강의를 기획하고, 예술계 내 행동 강령(2019)을 만드는 작업에 동참했다. 미술, 인디음악, 무용 장르가 모여 발표한 예술계 내 행동 강령에는 페미플로어가 무용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고민하며 담론을 형성한 과정이 담겨있다. 무용계 미투 이후, 예술계 내 행동 강령은 어떤 쓰임과 한계를 만났을까.
윤상은 ‘무용인희망연대 오롯_#위드유’에서 먼저 방청 연대를 꾸려주셔서 참여했지만, 긴밀하게 결합하진 못했다. 그래도 페미플로어가 다 같이 가서 인원으로 밀어 붙이자는 마음으로 앉아 있곤 했다. 여성예술인연대와의 교류를 계기로 시작된 예술계 내 행동 강령 작업은 페미플로어의 본격적인 활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이 의무화된 이후 무용의 특성이 반영된 몸, 공간, 경계 등에 관한 내용이 정리되면서 행동 강령이 교재로 활용되곤 한다. 하지만 의무 교육이 아닌 자발적인 영역, 특히 창작 파트에서는 활용도가 낮아 아쉬움이 있다.
유지영 무용계 #미투가 있었지만, 사실상 수면 아래 여전히 많은 이야기가 존재할 거라 생각한다. 여전히 말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페미플로어가 무용계 안의 페미니스트 그룹으로 불리지만, 폐쇄적인 무용계 구조와 씬으로부터 약간 벗어나 있지 않나 싶다. 계속 보수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구도는 바뀌지 않고. 어떤 환경이 조성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윤상은 예를 들어, 특정 발언이나 활동을 하면 낙인찍히거나 캐스팅 배제로 이어지는데 이건 생계 문제까지 연결된다. 나 역시 우리가 그나마 비켜나 있으니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조심스러운 분위기도 있고.
이민진 #미투가 한 사람의 무용 인생에서 엄청난 전환점으로 작동한 이들이 꽤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무용계 #미투라는 사건을 동일한 예술계에서 접하는데도,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경로와 경험이 다 다르다. 무용계에 종사하는 동료나 지인이 나에게 고해성사하듯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기도 하고. 한 다리만 건너도 아직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진짜 뿌리 깊게 바뀌어야 하는 환경 속에 우리가 없으니 난감하달까.
윤상은 이 대목에서 주목할 점은 하나의 사건으로 구조가 단번에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민진 무용가가 경험한 것처럼 고해성사하듯 말하기 시작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 한 사람이 있고, 그 한 사람 곁에 다른 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게 중요하다. 무용계는 회의감이 짙게 깔린 공간 같다. 변하지 않았던 세월이 길었으니까. 여기서는 안 될 거야, 하고 떠나버리는 이들도 많았고. 나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용 예술 안에서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문제가 있으면 이 안에서 논의하고 해결하고 싶다. 회의감에 매몰되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된다. 페미플로어의 활동을 하면서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서로 연결되는 운동성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 같다.
페미플로어의 ‘((없는 무용))’ 프로젝트는 크게 4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주혜영 무용가의 ‘유감 없는 살’, 유지영 무용가의 ‘착취 없는 밥 먹기’, 이민진 무용가의 ‘폭력 없는 오르가즘’, 윤상은 무용가의 ‘안무가 없는 춤’. 워크숍, 강연, 인터뷰, 좌담회 등 각 주제에 어울리는 형태의 프로그램이 기획되었다. 서로 다른 주제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창작자의 화두와 고민의 흐름이 선명하고 또렷하게 드러난다. 동시대 여성 퍼포머라면 한 번쯤 고민할 수밖에 없는 주제를 전면에 다루며 ‘몸’과 ‘주체성’, ‘연결’과 ‘춤’이라는 키워드가 서로 다른 주제 사이를 관통하며 페미플로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을 촘촘히 엮어낸다. 다이어트 강박과 섭식 장애, 비거니즘, 섹슈얼리티, 안무가-무용수 관계에 관한 고찰은 우리의 몸, 춤이라는 예술, 움직임의 영역과 어떻게 맞닿아 작동하고 있을까.
주혜영 무용가의 ‘유감 없는 살-내 몸은 죄가 없다’
주혜영 무용가는 무용의 시작과 동시에 섭식 장애를 경험했다. 입시 중심의 현실 속에 ‘무용=마른 몸’이라는 틀은 견고하게 작동한다. 마른 몸이라는 공식을 어떻게 깰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보여지는 몸을 위해 추던 춤은 진솔했던가’라는 질문을 만났고, 그 끝에는 ‘춤이란 무엇인가’라는 춤의 본질적 물음이 걸려 있었다.
주혜영 ‘((없는 무용))’은 지난 3년간의 고민과 기획이 담긴 프로젝트이다. 처음부터 나는 ‘살’이라는 주제에 꽂혀 있었다. 나부터가 섭식 장애를 무용의 시작과 동시에 앓았다. 사실 무용인에게 섭식 장애는 문제라고 느끼기 어렵고 알아차리기 힘들다. 무용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소양, 임무처럼 여겨져 잘못된 방향이라고 인식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유감 없는 살’ 워크숍이 열리기 직전에 참여를 취소한 분도 있었다.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무용계에 입문하기 위해 입시를 준비하고, 대학이라는 등용문을 통과해야 할 때 그 문은 마른 몸만 열 수 있다. 그동안 작업을 통해 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나름 정리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아직도 발가벗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춤을 미워하진 말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이민진 무용 공연 관람 후 일차원적인 감상평이나 특히 몸에 관한 평가가 많다. 춤을 볼 때 몸을 떼어 놓고 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유감 없는 살’은 한국의 무용 예술이 얼마나 사회적 이슈와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점에 있다. 우리의 몸을 서로 조금만 들여다봐도 정말 다양하지 않나. 그런데 무용계에서는 다양한 몸이 되는 순간, 배제되거나 너무 도드라진다며 무대에 서기 부끄러운 사람 취급을 받는다.
윤상은 춤을 통해 신체를 갈고 닦는 것에는 자기 수행적 측면이 있다. 그 과정에서 몸의 형태(shape)가 바뀌기도 하는 것이고. 하지만 건강한 수양 방식이 아닌 억압이나 외부의 말로 인해 스스로 강박적이거나 자신을 파괴하는 상태가 되는 것. 이건 굉장히 큰 문제이다. 엘리트 무용, 특히 교육과 입시 중심의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라는 세 장르에서 요구하는 견고한 미감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유지영 ‘유감 없는 살’은 사회와 맞닿아 있는 주제이다. 아직도 내 주변에는 다이어트가 최고의 고민이자 관건인 이들이 있다. 다양한 몸이라는 화두가 넓어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마르고 싶다는 욕구를 떨치기 어려워한다. 아이돌이나 무용계에는 마치 투명한 막이 씌워져 있는 것 같다. 이 투명한 막 안으로 들어오면, 다양한 몸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마저도 ‘그래도 무용하는 사람은 마른 몸이어야지’하는 식이다. 여전히 보수적인 상태라고 생각한다.
이민진 최근 미술 등 여러 장르에서 퍼포먼스를 위해 무용계와의 협업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무용계 내부의 기준과 시선이 넓어지지 않은 현재, 타 장르와 무용이 만나면 여전히 폭력적인 방식이 작동한다. 예를 들어, 무용씬에서 캐스팅을 원하는 경우 ‘무용하시는 분이니까 뚱뚱하시진 않겠죠?’라는 말을 듣고 강한 문제의식을 느끼지만, 비판하고 싶어도 정말 무용계 안에 ‘뚱뚱한’ 사람이 거의 없다. 무용이 여러 장르로 뻗어가는 시점인데, 몸은 여전히 소비되고 있는 상황이다.
유지영 무용가의 ‘착취 없는 밥 먹기-움직이며 비거니즘 실천하기’
유지영 무용가가 사유한 페미니즘은 억압, 차별, 여/남의 문제로 국한되었던 영역이 넓어지는 세계다. 페미니즘적 관점은 소수자, 교차성 등의 개념으로 확장되었고 유지영 무용가는 자연스레 비거니즘에 도착했다. 앞서 주혜영 무용가가 다룬 섭식 장애, 다이어트 강박, 마른 몸이라는 화두는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과도 맞닿아 있다.
유지영 나는 사실 페미플로어를 통해 밖에서는 표출하지 못했던 분노나 쌓여 있는 화를 풀어내기도 했다. 페미니즘적 고민과 기후적 고민을 각기 다르게 가지고 있다가 에코페미니즘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비거니즘까지 넘어갔다. 종간의 차별을 사유하는 것은 당연한 도착지처럼 느껴졌다. ‘((없는 무용))’을 통해 춤추는 몸과 비거니즘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이민진 ‘유감 없는 살’의 섭식 장애는 ‘착취 없는 밥’과 연결되고, ‘착취 없는 밥’에서 시도하는 실천은 ‘안무가 없는 춤’의 무용수 연대기와 삶으로 연결된다. 단순한 불편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불편한지, 무용계의 생리는 어떠한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윤상은 내가 무엇을 먹는지에 따라 내 몸이 바뀐다. 삶의 실천과 무용 작업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연동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유지영 2020년까지는 무용적인 고민이 중요했다. 극장이라는 공간, 공연 예술을 중심으로 무용을 고민했다면, 비거니즘을 접한 후 인간에게만 유효한 이야기를 뛰어넘어 확장된 주제를 고민하게 된다. 내가 먹는 것이 나의 몸과 움직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 결과 나의 삶이 어떻게 춤으로 발현되는지 탐구해보고 싶어졌다. 타 장르에 비해 무용계의 비건 인구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 듯 보인다. 다양한 공간과 연습실을 오가며 프리랜서로 작업하는 무용가의 직업적 특성상, 비건 지향을 지속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이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비거니즘을 일상에서 실천하기 위해서 단계가 필요하다. 이번에 꺼낸 비건 이야기가 무용계 안에서 얼마나 유용하게 다가갔을지는 잘 모르겠다. 당사자성이 없는 이야기이다 보니, 자기 검열하게 되는 순간도 찾아왔다. 나에게는 중요한 의제이지만 무용인에게 진짜 비건이 필요한 걸까? 무용인이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패턴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지를 중심에 두고 워크숍과 비건 가이드를 만들었다.
주혜영 먹는 연습을 통해 ‘먹기’라는 행위 자체를 안무적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나는 무용에서 몸은 떼려야 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몸이 무용의 주요한 재질이라면, 몸에서부터 이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민진 무용가의 ‘폭력 없는 오르가즘-여성 퍼포머의 섹슈얼리티 해방일지’
‘폭력 없는 오르가즘’은 한때 이민진 무용가가 푹 빠져있던 스탠드업 코미디로부터 출발한다. 많은 여성 코미디언의 섹스에 관한 농담이 힌트가 되었다. 무대 위의 여성 퍼포머는 얼마나 쉽게 대상화되는가. 사회적 규범이 작동하고 자신을 옭아매는 섹스에서 벗어나, 섹슈얼리티가 왁자지껄한 농담이 될 순 없을까. 이민진 무용가는 전공과 상관없이 관객에게 보여지는 직업을 가진 여성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에서 만든 포괄적 성교육 워크북 <에브리바디 플레져북>을 활용해 성적 즐거움을 수치화하고 작업에 대입하는 방식의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민진 참여한 분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할 말이 정말 많아 보였다. 이 워크숍이 아니었으면 어디에서 말하며 풀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섹슈얼리티와 관한 이야기는 비거니즘이나 위계보다도 때론 더 언급하기 어려운 주제라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워크숍 자체가 너무 즐거웠다. 섹슈얼리티는 무대 위 여성 퍼포머에 대한 대상화와도 직결된다. 의상 형태, 탈의 여부, 작품 속 역할 등이 퍼포머의 전부가 아닌데도 남성적 시선으로 대상화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여성 퍼포머가 신체가 과도하게 드러나는 의상을 착용하거나 전라의 퍼포먼스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퍼포머의 정체성이 아닐 텐데 너무나 손쉽게 대상화되곤 한다.
주혜영 이민진 무용가의 문제의식은 춤이 보여지는 방식이 얼마나 단일한지와 연결된다. 왜 춤은 이미지화되었을까? ‘유감 없는 살’ 워크숍 참여자 중 무용과 연극에서 활동하는 남성분이 있었는데, 마른 근육질 몸에 대한 강박을 언급하셨다. 무용가는 항상 준비된 몸에 대한 압박을 심하게 느낀다. 마치 몸 자체가 명함인 것처럼. 무용하는 몸을 구별 짓는 말도 쉽게 들을 수 있다. ‘역시 무용하셔서 그런지 척추가 바르시네요’ 같은 말.
이민진 무용가에게 준비된 몸이란 결국 어떤 성격의 작업이든 쉽게 벗고 아무거나 입을 수 있는 몸인 것 같다. 춤추는 몸, 작업을 이해하는 몸보다는 무엇이든 입을 수 있고 혹은 벗을 수 있는 몸. 무용계의 작업이 대부분 그렇다 보니 무용수가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번 워크숍을 통해 억압된 섹슈얼리티, 대상화된 경험을 공유했다면 불합리를 지적하고 실질적으로 어떤 방안을 제안할 수 있을지 좀 더 고민해보고 싶다.
윤상은 무용가의 ‘안무가 없는 춤-나의 무용수 연대기’
윤상은 무용가에게 무용수라는 직업은 늘 흥미로웠다. ‘떵샤의 모던댄스’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운영하고 예술계 내 행동 강령 작업에 참여하며 안무가와 무용수 간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는지 여러 관점을 수집해왔다. ‘((없는 무용))’에서는 안무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업관이 덜 드러나는 무용수의 해석에 주목했다.
윤상은 유지영 무용가가 종간의 위계를 이야기했다면, 나는 무용계 안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안무가-무용수 간의 관계를 다루고 싶었다. 나 자신이 무용수 정체성이 강해서인지, 무용수라는 직업 자체가 참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어떤 이들은 무용수로 참여한 작품은 자신의 작업이 아니라 선을 긋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하나의 작업에 들어갔다 나와 백지를 만든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무용수의 해석이 아카이빙 되는 경우는 적다. 작품의 크레딧에는 남지만, 무용수는 직업 특성상 사라짐의 숙명을 공통으로 겪는다. 그렇다면 무용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서 출발했다.
주혜영 몸으로만 접근하면 안무가와 무용수 간의 수직적 관계, 도구화된 몸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몸이 기량을 다하면 무용수에서 안무가로 넘어가는 것이 무용 생태계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무용을 몸의 기량을 중심으로 바라보면 ‘무용수의 수명은 짧다’는 말밖에 남는 게 없다. 나 또한 지금까지 기량이 달라진 몸, 다양한 몸을 위한 워밍업이나 몸을 만드는 다른 종류의 시간과 방법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유지영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무용수가 안무하는 게 관행처럼 여겨진다. 나는 무용을 잘한다고 해서 반드시 안무를 잘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용과 안무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그런데 자신이 해왔던 것을 만들려다 보니, 계속 마른 몸의 무용수를 찾게 되는 것 같다. 일체화의 고리가 끊어져야 몸에 관한 동일시가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윤상은 안무가와 무용수는 특수한 관계에 놓여 있다. 위계가 있지만, 도리어 뒤집히는 경우도 있고. 무용수가 안무의 작업을 흡수하는 방식이 각기 다르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어떤 사람은 비워내고, 어떤 사람은 쌓아서 덧입고, 어떤 사람은 기다리고. 각자만의 섬세한 언어가 존재하고 수용적이면서도 동시에 주체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신만의 언어와 색깔이 분명한 나이 든 무용수는 한국에서 설 자리가 적은 게 현실이다.
이민진 그동안 이런 이야기는 비공식적으로만 오갔다. 공식적인 플랫폼으로 접할 수 없는 담론이다 보니, 윤상은 무용가의 심층 인터뷰는 같은 무용수가 봤을 때도 엄청난 아카이브로 느껴진다. 작업의 양에 밀려 나의 무용을 해석하고 정리하지 못하는 경우도 사실 많은데. 나의 경험과 위치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페미플로어의 사라져야 하는 것들의 목록이 비단 무용계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몸에 대한 협소한 시각, 역할과 위치에 따라 형성되는 위계질서, 종 착취와 가속화되는 기후 위기, 소수자를 향한 폭력과 차별, 성적 대상화와 성폭력은 우리 모두의 일상을 좀먹는다. 몸이 그 자신의 탈출 불가능한 감옥이 될 때 세상의 춤은 멈출지 모른다. 춤이 사라지기 전에, 먼저 사라져야 할 것을 사유한 페미플로어의 활동은 그래서 더욱 반갑고 귀하다. 어쩌면 춤이기에 단번에 질서를 부수고 새로운 플로어(floor)를 열어 젖힐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도 품어본다. 희망은 눈 앞에 보이는 것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니까. 마지막으로 페미플로어의 활동에 관심은 있지만 참여는 주저하게 되는, 혹은 눈팅하며 망설이고 있는 동료가 있다면 어떤 말을 들려주고 싶은지 물었다.
주혜영 우리 무서운 사람들 아니다(웃음). 페미니즘에 관해 발화할 때 싸움을 건다거나 관계의 틀어짐을 조장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용 예술의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하자는 것이니까. 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페미니즘에 관한 지식이 거의 입문 수준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있어도 되는 자리일까 싶었지만, 동료와 이야기 나누며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다양한 연령층, 서울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더 이야기 나누고 싶다.
윤상은 네 사람 모두 관점이 다 다르다. 그렇지만 함께 있을 수 있다. 존중하려는 태도가 있으니까. 무용계 안에서 페미니스트 커뮤니티를 처음 만나보는데, 그동안은 결성할 시도를 못 했다면 지금은 이렇게 동료를 만날 수 있는 게 참 새롭고 좋다. 모두 알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동료를 만날 수 있다.
이민진 춤추다가 가끔 눈팅만 해줘도 괜찮다. 페미플로어 활동을 팔로우 정도 해줄 수 있지 않을까(웃음). 우리 맞팔하자. 그리고 우리 춤을 떠나지 말자.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의무감과 부담을 조금 덜 느껴도 좋을 것 같다. 직접적 연대 활동도 필요하지만,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유지영 사실 나는 종종 무용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하려고 한다. 가끔은 춤이 뭐라고 이러고 있나 싶을 때도 있지 않나. 춤 안 춰도 인생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훨씬 가벼워진다. 지금보다 덜 견고한 마음으로, 자신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에 목소리를 내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는 ‘어떤 몸이 춤출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너무 긴 세월 동안 애끓고 몸 닳고 끙끙 앓아 온 건 아닐까 싶다. 질문이 애초에 잘못 설정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페미플로어가 동료를 불러 모아 부재의 가능성을 떠올리는 동안, 질문의 답은 이미 우리 곁에 당도해있었다. 각자 발견한 구체적인 답은 다를지 모르지만, 그 답이 가리키는 길목에 ‘춤추고 싶은 이는 누구든 춤출 수 있다!’는 문장이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1 2022년 10월~12월 ‘페미플로어’가 진행한 ‘((없는 무용))’ 프로젝트의 소개 문구 중.
진행|보코, 소영
기록|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