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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아프리카의 새벽’을 열다, 기니의 아프리카 공연단

때는 바야흐로 1960년. 1960년은 ‘아프리카의 해’로 불린다. 카메룬을 시작으로, 토고, 말리, 마다가스카르 등 식민지배에 있던 스무여 개의 나라들이 독립했다. ‘기니(Guinea)’는 그들보다 2년 전에 독립했다.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의 압력에 당시 지도자 ‘세쿠 투레(Sekou Toure)’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자유 속의 가난을 원한다, 노예로 부자가 되는 것보다.” 당시 프랑스 지배를 받는 서아프리카권 나라 중 유일하게 독립을 선언한 나라였다.


오늘 이야기할 ‘기니’는 전 세계에 ‘아프리카 댄스’와 ‘젬베’의 열풍을 몰고 온 나라다.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세쿠 투레’와 당대 최고의 예술가 ‘포데바 케이타(Fodeba Keita)’의 기획에서 그 씨앗이 움텄다. 바로  ‘아프리카 공연단(Les Ballets Africains)’의 설립이다. 아프리카 국가 중 처음으로 국제적인 투어를 한 전문공연단으로, 아프리카와 유럽 전역, 중동과 남미, 미국 등 세계를 누볐다. 프랑스어로 된 팀 이름에 ‘발레’라는 말이 쓰여, 영어권 국가에서는 무용 장르 중 하나인 ‘발레’로 오해되는 경우가 있으나, 음악과 무용이 합쳐진 공연단을 뜻한다.


세쿠 투레는 민족 문화를 통합하며 ‘기니’라는 새로운 나라의 정체성을 국민들이 가지길 원했다. 국립공연단의 주요 레퍼토리는 서아프리카 만뎅 전통 음악, 이야기, 춤을 현대적으로 편곡하고 안무해 무대화한 내용이었다. 다양한 민족의 전통춤들이 섞이고, 무대 위에서 더욱 스펙터클하도록 변형했다. 마을 마당에서 펼쳐지는 의식이 공연의 방식으로 새롭게 재현되었다. 처음엔 해당 민족만 추던 춤을 다른 민족 출신의 댄서가 추는 것을 보고 반감을 표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공연을 거듭하며 국내의 반감은 줄어들었고, 국가는 공연단을 위한 문화예술교육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재능있는 단원을 경쟁적으로 길러냈다.


이쯤에서 왜 ‘기니 공연단’이 아닌 ‘아프리카 공연단’이라 이름 붙였을까 궁금해진다. 이유는 예술가이자 기니 내무부 장관을 지낸 인물 ‘포데바 케이타’에게 있다. 그는 뮤지션이자 시인, 안무가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실력 있는 예술가로 유명했다. 얼마나 유명했느냐 하면 택시 운전사들이 그의 사진을 차에 붙여놓았고, 라디오에선 그의 시가 흘러나왔다. 말리의 세계적인 기타리스트인 ‘알리 파르카 투레(Ali Farka Toure)’는 어린 시절 포데바의 연주를 듣고 기타를 배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기니 코나크리와 세네갈에서 공부하며, 음악과 시, 연극, 정치에 관심이 컸다. 구전 음악가 계급 젤리(Jeli)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에 특히 능했다. 그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캐리비안과 유럽, 아프리카 음악을 섞은 밴드를 구성했는데, 현대 만데 음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Eric charry). 당시 지배국가인 프랑스는 기독교 교육을 중심으로 ‘문명화되지 않은 아프리카인’들을 ‘충실한 프랑스 시민’으로 재탄생시키고자 했다. 식민지 학교 ‘퐁티(Ponty)’는 세네갈부터 코트디부아르까지 각지 학생들을 뽑아 한 곳에 모았고, 민족 문화의 뿌리를 제거하는 목적의 식민 교육을 행했다. 각기 다른 민족어를 쓰는 이들이 모였으니,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는 그들이 현재 배우는 프랑스어 뿐이기도 했다. 포데바는 여기에서 민족을 초월하는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정체성,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고민과 생각들을 키운다.


졸업 후 파리로 이주했고, 동창들과 밴드를 결성한다. 세네갈, 기니, 수단(말리), 코트디부아르, 카메룬 등 다양한 국적으로 멤버가 구성되었고, 그들은 모두 프랑스에서 ‘아프리카인’으로 불렸다. 그 팀이 바로 ‘포데바 케이타의 아프리카 공연단(Les Ballets Africains de Fodeba Keita)’이다. 1952년 데뷔하며 2년 동안 무려 170여 개 도시를 투어하며, 프랑스의 텔레비전, 라디오, 잡지 등 모든 미디어에 보도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포데바는 민족문화의 주제를 잃지 않으면서 퐁티 학교에서 경험한 ‘아프리카인’의 정체성과 연극 방식, 당시 유럽 주류 공연산업의 특징을 조합한 공연을 구성했다. 아프리카인의 자부심과 민족을 뛰어넘는 연대, 공동체성을 적극적으로 전면에 드러냈다. 50년대에 그들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와 서유럽, 동유럽, 남아메리카, 중동 등을 투어했다. 기니가 독립하자, 세쿠 투레의 요청을 받고 포데바는 귀국한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기니 독립공화국의 국립공연단이다.  


1960년 뉴욕 브로드웨이. 미국 공연의 반응은 더욱더 폭발적이었다. 세계적인 재즈 뮤지션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이들의 공연을 세 번이나 볼만큼 매료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음악, 재즈가 화려하게 꽃피우던 시절이었으나 여전히 백인 전용식당과 화장실이 존재하는 미국, 그래서 버스 보이콧부터 백인 전용식당 점거까지 흑인 인권 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미국이었다. 아프리카계 미국 예술인들은 노예무역의 피해 역사를 되짚으며 캐리비안 지역과 남아메리카에서 뿌리를 찾고 있었다. 기니 공연단의 공연은 지금까지 지리적 이유로 접할 수 없었던 서아프리카의 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대부분의 노예무역 피해자들은 서아프리카권에서 온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관객들에게는 자신의 ‘뿌리’와 바로 연결되는 경험이었다. 몇몇 젊은 흑인들은 직접 아프리카로 가거나, 이 춤과 음악을 배우고  싶어 했다. 당시 인권 운동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이 연이어 발생했던 시대적 상황과 함께 기니 공연단이 선보인 ‘아프리카 예술’은 미국 흑인들이 빼앗겼던 정신적 유산과 뿌리를 살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기니 공연단이 국제적으로 성공한 사례를 보며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도 국립공연단을 만들며 한창 유행이 일었다. 하지만 1984년 세쿠 투레의 죽음 이후,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가 끝이 나고 공연단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며 활동이 점점 줄어들었다. 외국인 관객들을 의식해 이국적인 면만을 너무 강조한 레퍼토리가 비판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매년 기니의 전통문화와 예술을 더욱 깊이 배우기 위해, 전 세계에서 기니 코나크리를 찾는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스승인 젬베 연주자 ‘파마두 코나테(Famadou Konate)’, ‘마마디 케이타(Mamady Keita)’, 댄서 ‘유수프 쿰바사(Yousouf Koumbassa)’, ‘무스타파 반구라(Mustapha Bangoura)’등 역시 모두 국립공연단 출신이다. 오늘날 우리가 수업에서 배우거나, 전통춤 공연에서 만난 아프리카 춤은 대부분 이 시대 영향의 연장선에 있다.


서로 다른 두 문화의 만남은 항상 ‘오해’를 동반한다. 당시 미국 브로드웨이, 열띤 환호성 사이로 욕설 또한 난무했다. 가슴만 가린 채 거의 상체를 드러낸 여성 댄서들을 보고, 어떤 기자는 ‘야만적이다’라는 평을 남겼다. 옷을 ‘더’ 입고 ‘덜’ 입는 것이 야만의 기준일까. 그 기자는 아마도 그리스 고대 축제를 재현한 공연을 원시와 야만으로 표현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몸’과 당신의 ‘눈’ 중 어느 쪽이 더 야만적인가. 나의 ‘눈’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입’으로 내뱉기 전에 ‘눈’을 먼저 의심하자. 나도 모르는 사이, 제국주의자의 렌즈를 끼고 세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1968년 미국에서. ‘Les Ballets Africains’ 공연

Fodeba Keita – Afrique de demain (포데바 케이타 – 내일의 아프리카)

본 글은 기니 발레단과 미국 공연, 프랑스의 서아프리카 식민지배와 포데바 케이타의 예술활동 등에 대해 기록한 논문 <Stages in Transition : Les Ballets Africains and Independence, 1959 to 1960>의 내용들을 많이 참고하여 썼다.

<참고자료>
위키피디아 – Sekou Toure, Fodeba Keita, Les Ballets Africains
논문 Stages in Transition : Les Ballets Africains and Independence, 1959 to 1960, Joshua Cohen, 2012
책 <만데 음악 Mande Music> Eric Charry, 2000
책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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