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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효선 ‘나의 탈춤 이야기’

벌써 십년하고도 몇 년도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내가 한 ‘여자’대학교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일이다. 반 친구들은 수더분한 네가 어떻게 그 학교를 다니겠냐며 입학 전에 꼭 명품 가방 하나는 장만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우리 엄마도 학교 애들한테 꿀리지 않아야 한다며 백화점에서 비싸고 예쁜 옷들을 사다주셨다. 그리하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블링블링한, 누가 봐도 새내기의 옷차림으로 차려입고 대학교에 첫 등교하던 날, 정문 옆에 걸려 있던 한 동아리의 플랜카드가 내 눈에 들어왔다.

– 탈아(脫我): 춤은 나로부터 해방하려는 몸짓


뭔가 그럴 듯하게 멋져 보이는 문구였다. 그렇지만 그 의미가 완전히 이해되지 않은 채 저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걸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나는 저 문구가 굉장히 끌렸던 것 같다. 그리고 우연히 들은 장구와 북 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춤을 덜쑥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그 문구가 걸려 있는 탈춤 동아리방 문 앞에 서있었다.

알고 보니 명품 백도, 비싼 옷도 필요 없었던 학교에서 나는 매일 같이 동아리방에 들려 탈춤이라는 종합예술을 익혔다. 춤과 악기와 노래를 배우고 나면, 우리가 올리고 싶은 공연의 주제와 내용에 대해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여건이 되는 한 창작 마당극을 정기공연으로 올리려고 했는데, 한 시간 남짓한 극의 대본을 작성하고 그에 적절한 춤과 음악을 구성하느라 말 그대로 머리를 쥐어뜯는 창작의 고통과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창작극을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기존의 탈춤에는 여자에 빠져서 파계한 노승, 그런 파계승과 예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대결하는 취발이, 갖은 고생 끝에 헤어진 남편을 만났건만 남편에게는 젊은 첩이 있고 끝내는 남편에 맞아 죽은 미얄할멈의 이야기가 주요 서사로 등장한다. 그 내용에 공감하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여성의 몸으로 무대에 오른 우리가 ‘대상화된 여성’을 연기하기엔 불편감이 앞섰다. 게다가 애시당초 탈춤을 추는 연희자도 대대로 남성의 몫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여성은 강자의 억압에 맞서 풍자와 희화하는 약자의 위치에도 서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로 가득 찬 한 판을 제대로 꾸려보기로 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공연 중 하나는 66 사이즈의 여자와 44 사이즈의 여자가 각기 다른 이유로 다이어트를 하다가 사기꾼이 주는 약을 잘못 먹고 모두 죽어버렸다는 다소 비극적인 결말의 극이었다. 대부분의 부원들이 다이어트를 해봤거나,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 혹은 스스로가 뚱뚱하다는 걱정을 한다는 점에서 출발하게 된 공연이었다. 우리는 여럿의 사람들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극 중 등장인물들이 다이어트에 목매게 된 것이 개개인의 만족감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주입된 욕망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언어유희를 잔뜩 섞은 대사들, 알고 있는 모든 춤사위를 동원하여 만든 춤들, 나름 관객 참여형 공연이라며 관객들 앞에서 떨던 갖은 너스레들로 만들어진, 어떻게 보면 어설프고 미숙했던 그 공연의 끝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두 영혼의 넋을 기리기 위한 굿을 할 때, 나는 어쩐지 눈물이 찔끔 났다.

여자에 대한 편견과 어떤 시선이 있다. 여자는 아름답고 상냥해야한다, 화장을 하지 않거나 뚱뚱한 여자는 자기 관리가 부족한 것이다, 똑똑한 여자는 기가 세다, 여자들은 사치한다, 여자는 사회생활을 잘 하지 못하니 승진에서 누락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전제들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견고하게 짜인 것들이라서 여기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뿐더러 이것의 부조리함을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혹은 우리는 그러한 편견과 부조리함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에서 탈춤을 췄던 것 같다. 어쩌면 여자가 탈춤을 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여성의 몸은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문화적 정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극의 형식을 빌려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며 더 자유로이 나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회에 나온 이후로도 나는 여전히 여러 편견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편견이 나를 주저앉히지 않도록 노력한다. 다행히 나에게는 탈춤을 추면서 익힌 해학과 위트, 건강한 체력, ‘웃기고 특이하다’는 시선에 코웃음 칠 수 있는 노련함 등이 있다. 무엇보다 나를 세상에 내보일 때 느낄 수 있는 짜릿함에 대해서 잘 안다.

앞으로도 해방을 위한 춤을 출 것이다.

글 / 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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