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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메를렝 니야캄(Merlin Nyakam) – 춤, 각자의 진실을 꺼내는 행위



어떤 세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잘 들리지도 않는다. 나와 무관하다고 여기는 세계에 대해서는 애쓰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알아보지 못하면 적어도 나의 세계 안에 부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분명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세상은 넓고 무용수와 안무가, 춤추는 이는 많다. 지금, 이 순간도 분명 누군가는 춤에 몰두해 있을 것이다. 비언어적 장르라는 무용 예술의 특성상, 굳이 언어라는 장벽을 뛰어넘지 않아도 모두의 춤에 접속할 수 있다. 그러나 애쓰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하면 영영 만날 수 없기도 하다. 춤의 바다는 넓고 제아무리 열심히 헤엄쳐봐도 모든 곳에 다다르기란 불가능하니까.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카메룬 출신의 안무가 메를렝 니야캄(Merlin Nyakam, 이하 메를렝)은 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세계에 있었다. 내가 알아보지 못한 세계에. ‘왜 아프리카 출신 무용수의 춤은 아프리카 춤이라고만 그저 납작하게 불리곤 할까?’, ‘왜 아프리카 춤인지 아닌지 질문받는 걸까?’, ‘이 질문들은 무엇을 가리고 무엇을 드러내는가?’ 춤추기 시작하면서 이같은 질문을 맞닥뜨리지 않았다면, 메를렝 안무가는 영영 내가 다다르지 못할 세계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몇 년에 걸쳐 질문을 붙잡고 있다 보니 흘러 흘러 얼굴도, 이름도 처음 보는 안무가를 만나게 되었다. 물음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싶다는 바람이 만남을 성사시켰다. 제한된 시간 동안 대화는 거침없이 본론을 향해 질주했다. 

내 작품을 이야기할 때, 나는 ‘현대 아프리카 춤(Afro-contemporaine)’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제목이나 용어 선택에서는 보편적인 것을 택한다. 오늘날 2021년의 방식으로. 아프리카는 나의 정체성이고, 여기에서의 현대는 우리가 사는 오늘을 의미한다. 나의 뿌리는 아프리카에 있지만, 이 뿌리라는 것은 변형되기 마련이다. 나는 창조하는 사람, 즉 창작자이다. 그래서 춤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지 오래 생각하고 우리의 현재를 돌아본다. 작품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우리 이런 문제가 있으니 한 번 돌아보자, 하고 자각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메를렝 안무가는 카메룬 국립 무용단의 관심과 주목을 받으며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무용수의 이력을 쌓았다. 13세에 국립 무용단에 입단, 16세에 수석 무용수가 되었다. 최연소 솔리스트였다. 일찍이 경험한 무용 경력을 바탕으로 1991년 프랑스 연출가의 작품에 캐스팅되면서, 본격적인 프랑스 기반의 활동을 시작한다. 

organicus fin atelier

처음부터 프랑스에 거주할 계획은 아니었다. 카메룬과 아프리카 등지를 오가며 활동하려던 차에, 프랑스 연출가 작품 이후 프랑스 정부로부터 장학기금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전통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부를 하고, 동료를 만나 협업을 해왔다. 프랑스에 가서 보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아프리카는 서아프리카 중심이었다. 중앙아프리카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일부분으로 재단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곳곳의 문화를 알려야겠다는 결심으로 다양한 아프리카 출신의 안무가와 협업을 하게 되었고 프랑스에 도착한 이후로는 늘 일하는 상태였다.  



메를렝이 속해있던 몽딸보-에흐비우(Montalvo-Herview) 무용단에서 1997년부터 2018년까지 무용수, 가수, 배우로 대부분의 작품에 참여하며 왕성하게 활동해왔다. 2000년, 댄스 비엔날레(Dance Biennial and the CCN of Créteil, Biennale de Danse du Val de Marne)에서 수상하며 프랑스에서 자신의 무용단인 라 깔바스(La Calebasse)를 창단했다. 무용단의 첫 작품인 <원시적인 재창조(Récréation primitive)>는 아프리카 출신 안무가 최초로 프랑스 샤이오 국립극장(The Theatre National de Chaillot)에서 작품을 올렸다. <원시적인 재창조>에는 다섯 갈래로 머리를 땋아 오묘하고 강력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메를렝 안무가를 비롯해 다섯 명의 무용수가 등장한다.    

다섯 무용수는 자연의 필수 요소를 의미한다. 물, 불, 흙, 공기 그리고 마지막은 인간. 이 작품의 주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다. 인류가 지구를 결국 파괴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고민. 작품은 ‘대면’을 다룬다. 인간 대 인간의 대면, 자연에 둘러싸인 인간들의 대면을. 



2001년 초연한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20년이 지난 현재까지 유효하다. 기술과 문명이 인간을 구원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달리, 기후 위기는 인간의 성찰 속도를 앞지르며 가속화되고 있다. 코로나 19 펜대믹 선언은 1년이 지나도록 수습되지 못했고, 마스크는 이제 거의 필수적인 의복이 되어버렸다. 인류는 과연 바람직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원시적인 재창조> 작품 소개 글 중 안무가의 말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인간-영적으로 풍부하나 현실에선 빈곤한, 저항하는 종(espèce rebelle, riche en génie mais pauvre en bon sens)-은 모든 것을 파괴하며 끝낼 것인가?



작품명인 ‘원시적인’이라는 표현 역시 작품의 문제의식과 더불어 연일 화제에 올랐다. 원시는 곧 과거를 뜻하는 게 아닌가. 인류가 다시 원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사실 ‘원시적인’이라는 말에는 경멸의 뉘앙스가 담겨있다. 뭔가 너무 과거인 것은 아닌가 하는. 과거, 맞다. 우리는 현재를 살기 위해 과거를 돌아봐야 한다. 돌아보는 것은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니다. 인류라는 공동체적 관점에서 볼 때,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적 요소는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무언가를 창조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도달해본 적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영적으로 풍부한 생명체인 인류. 동시에 끝끝내 저항하기를 멈춘 적이 없는 종. 과연 우리는 생태계를, 공동체를, 나와 당신을 파괴하지 않고, 끝장내지 않고 또 다른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원시적인 재창조>에서 발현된 메를렝 안무가의 문제의식은 최근 2020년 발표작인 <호미니데우스(Hominideos)>로 이어진다. 

호미니데우스

작품 연구를 하면서 인류 시초의 움직임에 대해 연구했다. 허리를 펴기 시작하는 등 원시적인 행동과 움직임을 관찰하면, 결국 자신을 떠올리게 된다. <호미니데우스>는 인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예를 들어 종교 전쟁을 떠올려보자. 종교는 내면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우리는 외면적 상징을 위해 싸우는 일이 허다하다. 이때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성은 무엇인가? 남아있는 인류애는 무엇인가? 작품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성, 근본적인 인류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호미니데우스>에는 다섯 명의 흑인 남성 무용수와 한 명의 백인 여성 무용수가 출연한다. 모든 무용수가 흑인이었을 때는 작품을 호평하던 한 평론가는, 백인 여성 무용수가 출연하자 작품을 혹평하기 시작했다. 

굳이 왜 여성 한 명이 들어갔나? 게다가 왜 백인 여성인가? 대체 왜? 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나는 반문했다. 왜 안 되는데? 이 여성이 흑인인지 백인인지 그것이 가장 중요한가? 그는 피부색이나 인종적 특징과 관련 없이 온 세상의 여성을 대변하는 것 뿐일 수도 있다. 이건 일종의 정치적 포석이기도 하다. <호미니데우스>에 예술적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으려 했는데. 실은 나의 작품에는 늘 정치적인 면이 있다. 



1990년대 초 프랑스에서는 ‘아프리카’라는 문화적 배경이 대단히 주목 받는 상태였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아프리카 예술가로서 메를렝 안무가는 흑인 무용수와 백인 무용수가 공존하는 작품을 구성적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어왔다. 이때 직면하게 되는 인종 차별은 이전과는 달랐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이었다. 

호미니데우스

이건 아프리카 작품인데 왜 백인이 등장하는가? 백인은 빼야 한다, 이런 식의 또 하나의 인종적 차별을 맞닥뜨리게 됐다. 현재 한국도 비슷한 종류의 질문을 받을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아시아 국가에는 유럽에 비해 거주하는 아프리카인이 많지 않아서, 하나하나 격렬한 싸움일 거라고 생각되는데. 예를 들어 엠마누엘 사누 안무가와 춤을 추는 한국 무용수도 왜 한국인이 아프리카 춤을 춰? 이런 질문을 받지 않나.



출신 국가, 피부색, 인종을 포함해 성별, 성 정체성, 장애, 외모, 종교 등 편견에서 비롯된 시선은 작품을 그 자체로 들여다보는데 훼방을 놓는다.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잘 들리지도 않았던 세계에 접속할 가능성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메를렝 안무가는 어두운 피부를 가진 아프리카 출신 무용수에 대한 시선이 때론 ‘병적인 호기심’에 가깝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음과 양(Ying Yang>이라는 작품은 인구의 90%가 무슬림인 세네갈에 만들었다. 여기에는 남녀 두 명의 무용수가 등장한다. 남성은 작고 가냘픈 체구이고, 여성은 남성에 비해 큰 체격에 넥타이를 맨 양복 차림이다. 성별 전환을 연상시키는 유머가 가미되자, 심각한 내용도 받아들여지는 여지가 훨씬 컸다. 앞선 <호미니데우스>에서 작품을 작품 자체로 보지 않고, 그 안에서 인종적 이슈만을 발견하는 것. 이 궁금증 자체가 상당히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 늦게 와서, 결과적으로 적절한 때에 도착한 셈이 된다. 메를렝 안무가와의 대화가 그랬다. 그가 머물던 곳은 나에게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세계. 알아보지 못했기에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 하지만 이 대화 이후 그 세계는 내 세계 안에 존재하고, 그와 나의 세계에는 현재가 있다. 서로를 인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대하며, 우리가 나아갈 힘의 방향을 고민하는 관계로서.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나의 진실이고,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은 당신의 진실이니 우리 각자의 진실을 꺼내 보자. 소통을 시작하자. 자는 채로 숨죽여 있을 것인가, 깨어나 이야기를 시작할 것인가? 





기록 | 보코



참고 

– 이 인터뷰는 쿨레칸의 ‘데게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춤 : 경계를 넓히는 용기와 자유’를 주제로 2021년 1월 28일, 2월 17일 2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대화를 바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을 받아 청년국제교류네트워크 구축 사업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라 깔바스(La Calebasse) 극단 홈페이지
https://www.lacalebasse-merlinnyakam.com

– 프랑스 샤이오 국립극장 <원시적인 재창조(Récréation primitive)> 작품 소개
https://www.theatreonline.com/Spectacle/Recreation-Primitive/5414

– <호미니데우스Hominideos> 작품 소개 
https://www.dropbox.com/s/7sncs1pqbbjgu9z/HOMINIDEOS_dec20.pdf?d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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