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최승희 무용가 “무용은 시대와 사회의 산물입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서 생각해요. 당신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날로부터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줄곧 당신에 대해서 생각했어요. 나와 다른 시대에, 여성으로 춤춘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지. 춤이라는 예술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이에요.
당신이 남긴 기록과 당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남긴 글을 이리저리 찾아 헤맸어요. 샅샅이 뒤쫓다 보면 내가 품은 물음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건져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무용가라고 하기엔 당신의 기록은 그리 많지 않았어요. 빛바랜 흑백 사진, 오빠와 주고받은 편지, 짤막한 회고록, 몇 편의 평론과 신문 기사의 코멘트. 나의 역량 부족인지, 기록의 한계 때문인지, 글과 글 사이를 거닐다 보면 잡힐 듯 말 듯 무언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 버리네요. 당신에 대해 끊임없이 글을 읽었지만, 정작 당신의 춤은 보지 못해서일까요. 나는 당신이 궁금해요.
당신을 처음 알게 된 날의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요. 당신에 대한 첫인상은 화들짝 놀랐던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당신이 언급한 ‘동양 무용’이라는 말은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개념이었거든요. 처음 들어 본 표현이기도 했거니와, 개념의 장대함에 머릿속 어딘가 꺼져있던 전등에 번쩍 불이 켜지는 느낌이었답니다. 당신은 이렇게 적었죠.
나는 동양의 리듬을 가지고 서양으로 싸우러 건너갑니다. 아, 나는 기쁩니다. 용기백배입니다.
조선, 만주, 중국, 몽골, 일본을 아우르는 동양의 리듬과 춤이라니요. 참으로 웅장하고 크고 단단한 개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관념에 머물지 않고 현실 세계 한복판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나는 당신의 힘 있는 목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전혀 그럴 리가 없는데도요. 환청 같은 목소리에 자꾸만 이끌리며 나에게 남겨진 문장을 곱씹었습니다. 강함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강함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들은 세계 으뜸가는 새로운 동양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라 생각합니다. 참으로 뛰어난 예술은 서양적인 것이든 동양적인 것이든 간에 결국 서로 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술인 경우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강함이란 신념에서 오는 것인가요? 신념은 굳은 믿음과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더해질 때 작동하지요. 나는 믿음과 의지의 씨앗이 당신에게 언제 뿌려졌는지 찾기 위해 다시 촘촘히 당신의 족적을 훑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난생처음 무대 위의 춤 공연을 본 날의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훗날 당신의 스승이 된 이의 독무였죠.
쇠사슬에 얽혀 무거운 걸음으로 무대를 밟는 그의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아, 그때 나는 저것은 춤이 아니라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껏 춤이란 기쁘고 즐거울 때만 추는 것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무언가 무겁고 괴로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누구나 춤이라는 세계에 접속하게 되는 순간 마주하는 공통의 장면일지도 모릅니다. 춤이 단순히 기쁘고 즐거운 흥겨움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 한 존재가 온몸으로 발산하는 감정과 감각이 고스란히 나의 몸에 전해지는 경험. 그걸 태어나 처음 보는 춤 공연에서 느꼈다면 당신은 타고난 무용수라 가능한 것이었다고 여겨도 될는지요. 나는 춤을 추면서 매일 같이 패배감을 맛봅니다. 내가 가진 몸,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몸, 타고난 몸의 한계를 시시각각 직면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놀랍게도 당신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었습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나서 남보다 큰 육체를 가졌다는 것이 가느다란 정서를 부족하게 만든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하면 이는 무용가로서의 가장 큰 슬픔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한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필연적 결과이자 슬픔이라고 적었습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열정과 확신을 결연하게 드러낸 당신의 그 어떤 말보다 이 한 문장에서 당신만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의지를 발견합니다. 당신의 춤에 대한 의지는 연구와 기록으로도 이어집니다. 특히 앞으로 이 춤을 추게 될, 당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될 다음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죠. 춤을 기록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당신은 무용을 시작하는 아이들을 위한 저서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무용기본동작 및 작품지도에서 인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능력만을 길러 주어서는 안 됩니다. 즉, 인간 행동은 사상 감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만큼 중요한 것은 내면적인 정신 관계가 선명하게 발현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아주 선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춤을 추는 몸은 그 몸이 구축한 하나의 세계와 내면을 드러낸다는 사실을요. 우리는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요. 당신은 또 다른 지면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예술 의식은 잃어버리고 그저 춤을 위한 춤, 공연을 위한 공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공간과 시간의 궤적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춤을 찾는 일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당신의 춤 앞에는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시대적 상황에 따라 민족주의, 사회주의, 동양주의, 표현주의는 등의 이름표가 붙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춤의 무엇에 일본, 중국, 유럽, 북미, 남미의 관객들은 감화되었던 것일까요? 그 어떤 해석보다도 당신에게 춤의 자립성은 중요한 화두였던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무용 독자의 생명력을 지니고 싶다고 여러 차례 강조해 말했으니까요.
자신의 무용을 풍부하게 만든다는 것은 여러 가지 다른 무용의 단순한 배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무용의 표현성의 확대와 깊이와 넓이를 크게 획득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것은 다만 예전부터 있어온 진기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무용으로 하여금 자기가 속해 있는 생활에 대한 적응과 자기의 육체적 가능성 위에 서서 표현하는 자기 형성의 획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사설이 길었지만 내가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묻고 싶은 질문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춤은 무엇인가요? 당신이라면 이 물음을 추상적이고 거대하다고 여기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 당신은 이렇게 답하겠죠.
무용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생각은 무용은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무용이란 결국에 있어서 시대라는 것과 사회라는 것을 초월해서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시대에 맞게 창작하지 않는 작품은 예술이 아닙니다.
이 글은 만약 내가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길고 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떤 물음과 답으로 채워질지 상상하며 시작했어요. 마치 가상의 인터뷰처럼요. 하지만 당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당신이 들려준 답을 찾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강해졌습니다. 당신이 남긴 기록을 읽으면 읽을수록 글 사이의 공백을 메울 자신이 없어졌거든요. 이 인터뷰는 실패했습니다. 대신 나는 편지를 씁니다. 이 글을 읽지 못하는 당신에게. 혹은 다른 시공간에서 이 글을 발견할 당신을 향해.?
글 | 보코
이 글은 아래의 기록을 참고해 쓰여졌습니다.
남화연, <반도의 무희>, 2019, 멀티채널 비디오
최승희, <1911~1969, 세기의 춤꾼 최승희 자서전 불꽃>, 2006, 자음과모음
최승희, <조선민족무용기본>,1957, 조선예술출판사
이영란, <최승희 무용예술사상>, 2014, 민속원
강이향, <최승희 생명의 춤 사랑의 춤>, 1993, 지양사
유미희, <20세기 마지막 페미니스트 최승희>, 2006, 민속원
김선우, <나는 춤이다>, 2008, 실천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