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_침묵하지 않는 춤 ①] 윤상은 안무가 “그런데 이 죽음들이 대체 다 뭐지?”
2021 인터뷰 시리즈
[침묵하지 않는 춤 – 페미니즘으로 본 춤의 세계]
다양한 예술 영역에서 페미니즘적 관점과 사유가 확장되고 있다. 퀴어/여성 서사에 주목하는 문학, 페미니즘 연극제, 여성주의로 읽는 미술사 등 위계와 차별에 맞선 창작과 기록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는 끝없이 이어진 문화예술계 미투, 성폭력과 가부장적 폐습을 지적하고 성찰을 요구해온 목소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몸이 주요한 매체이자, 곧 주체이기도 한 춤의 세계는 어떨까? 2021년 한 해 동안 이 질문을 오래 품고 동시대의 춤을 탐구해보려 한다. ‘페미니즘으로 본 춤의 세계’라는 부제를 단 이번 인터뷰 시리즈에서는 성별, 장애, 나이, 외모, 성 정체성, 건강 상태, 사회적 신분 등과 관계없이 차이를 차별로 인식하지 않는 실천 윤리인 페미니즘을 중심에 두고 지금, 오늘의 춤을 살펴본다. ‘침묵하지 않는 춤’은 무용 담론에서 벌어져 왔던 위계와 배제의 구조를 확인하고, 수행적인 예술로서 춤추기를 멈추지 않은 이들에 관한 기록이다.
1) 한 남성과 순수한 시골 처녀가 사랑에 빠진다. 둘은 ‘사랑한다, 안 한다.’ 꽃점을 치며 서로의 사랑을 하늘에 맹세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남성은 귀족 출신이었고, 귀족 여성과 약혼한 상태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시골 처녀는 그 충격으로 미쳐서 사망한다.
2) 한 남성이 약혼녀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의 앞에 백일몽처럼 요정이 나타난다. 남성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요정이 날아가 버릴까 두려워진 남성은 요정의 날개를 꺾을 수 있는 스카프를 마녀에게 구해온다. 요정에게 스카프를 걸쳐주자 날개는 꺾이고 요정은 결국 죽는다.
3) 한 왕자는 무희와 성스러운 불 앞에서 서로의 사랑을 맹세한다. 하지만 왕자에게는 이미 약혼녀가 있다. 무희는 둘의 결혼식에 축무를 추는 비극적 상황에 빠진다. 결혼식 날, 약혼녀는 무희에게 하사한 꽃바구니에 독사를 넣어 그녀를 죽게 만든다. 무희를 흠모한 승려가 해독제를 건네지만, 무희는 왕자와 함께하지 못하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며 약을 마시지 않고 죽음에 이른다.
4) 한 왕자는 호숫가로 사냥을 나갔다가 아름다운 백조 인간을 발견한다. 백조 인간은 저주에 걸려 낮에는 백조로, 밤에는 인간으로 살고 있다. 진정한 사랑만이 저주를 풀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왕자는 백조 인간을 무도회에 초대해 자신의 신부가 되어주기를 당부한다. 그러나 무도회에 왕자를 찾아간 것은 악마와 그의 딸이었다. 악마의 딸을 백조 인간으로 착각한 왕자는 사랑을 맹세해버리고 만다. 다시 왕자가 호숫가로 찾아갔을 때, 슬픔에 잠긴 백조 인간은 절벽에 떨어져 자살한다.
네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있다. 여성은 순진한 시골 처녀이거나, 무희이거나, 심지어 인간도 아닌 요정이거나 백조 인간이다. 사랑을 맹세하는 동안 인간 남성은 신분을 속이거나, 이미 약혼자가 있거나, 곁에 두려다 파괴를 자초하거나, 사랑한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모든 상황을 뒤늦게 알게 된 여성은 미치거나, 날개가 꺾이거나, 독사에 물리거나, 절벽에서 떨어진다. 결국, 여성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너무 뻔하고 진부한 서사인가?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1)지젤 2)라 실피드 3)라 바야데르 4)백조의 호수. 네 가지 이야기는 수 세기에 걸쳐 사랑받은 발레 작품의 주요 서사이다.
‘미친 여자 연기가 선망의 무대가 될 때, 발레는 우리에게 무엇이 되었을까?’1 8세에 시작해 대학 전공에 이르기까지 발레를 훈련해 온 윤상은 안무가가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쏘아 올린 질문이다. 윤상은 안무가는 작품 <죽는 장면>을 통해 발레의 절정에 배치된 여성의 죽음들을 재현하며 묻는다. ‘그녀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긴 세월 고전으로 칭송받던 발레라는 춤의 장르에서 이제껏 이 같은 질문이 칭송과 비슷한 농도로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의문스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윤상은 안무가에게 대화를 청해 직접 물었다.
발레의 위치가 그렇다. 고전, 클래식이라 칭하니, 마치 그대로 고이 보존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발레리나들은 하나의 역할을 잘 표현하기 위해 수십 년 피나는 노력을 한다. 장인 정신과 유사하다. 그 세월이 너무 길다. 발레리나가 되기까지의 세월이. 그러다 보니 노력에 대해 당연히 존중이 생기고, 그러면서 감히 누가 탁, 문제의식을 제기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긴다. 게다가 현재 한국의 발레 안무가는 90%가 남성이다. 똑같이 교육받았는데 남성은 자기표현에 거침없고 창작의 주체가 쉽게 되는 반면, 여성은 발레에서 늘 수동적인 위치나 뮤즈라는 이름으로 둔갑해있다. 이런 부분은 사회적 인식이랑 같이 간다.
윤상은 안무가 역시 어린 시절부터 발레를 혹독히 훈련해왔다. 기술과 완성도가 중요한 장르이기에, 발레를 훈련하는 당시에는 서사를 중요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대학에서까지 발레를 전공했지만, 발레에 대한 무언의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창작에 관심이 기울면서, 발레는 상대적으로 더 꽉 짜인 틀처럼 느껴졌다.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동안 발레와 거리 두기를 택했다. 그 시기, 잠시 머물던 캐나다에서 우연히 컨택-임프로비제이션(Contact Improvisation) 커뮤니티를 만났다.
일주일에 한 번씩 즉흥 춤, 컨택 잼을 하면서 그사이 몸이 완전히 바뀌었다. 발레는 힘을 위로 쫙 끌어 올려야 하는데, 점점 거리 두다 보니 중심이 밑으로 내려가더라. 발레로 긴장되어 있던 근육이 풀어지고 완전한 이완이 가능해졌다. 그런 경험과 시간이 있었다.
발레와 멀어지는 시간을 쌓으며 윤상은 안무가는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오랜시간 모든 것을 쏟아부어 전력투구한 자신을 부정하는 스스로에 대해서 슬프기도 했다. 그러나 발레와 멀어진 ‘그런 경험과 시간’은 결과적으로 발레를 객관적인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죽는 장면>의 탄생에는 복합적인 요소들이 있었다. 페미니즘 인식론을 공부하고 받아들이면서 겪은 변화들도 있었고, 근원의 질문에는 연애 관계도 있었다. 내 연애는 왜 이런 식이지? 친구들과 연애 얘기를 하다 보면 어떤 지점에서 비슷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관계에 절절매는 태도, 동시에 쿨함에 대한 강요 같은 것.
실연을 겪은 상태, 윤상은 안무가는 발레 영상을 보면서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앞서 소개한 1)지젤 편. 사랑에 빠졌다가 미쳐 죽는 발레리나의 연기는 절절했다.
실연당한 순간, 발레 영상을 보고 있다니. 그때부터 드라마틱한 죽음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됐다. 다른 여러 작품에서도 여성들의 죽음으로 극이 전개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죽는 장면만 클라이맥스로 따로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죽음들이 대체 다 뭐지?
멀어지고 나서야 더 잘 보였다. 발레 서사에 보편적으로 다뤄지는 여성의 죽음이. 지금이 아니면 이 작업은 못 하겠다는 판단도 들었다. 동시에 원작을 어디까지 충실하게 재연할 것인가, 발레리나에 대한 조롱과 오독으로 읽힐 가능성은 없을지 우려도 앞섰다.
중요한 건 내가 발레 전공자로 정체화했던 사람이었기에 이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세계에 완전히 몸담았던 사람이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과 단순히 제 3자가 모방하는 것은 다르다. 이 지점을 분명히 전달하려고 애썼다. <죽는 장면>은 작품 자체의 메시지도 분명하지만, 내 안의 모순점을 발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발레를 다 때려치우려던 나와, 몸으로 변화를 받아들이는 나에 대해 입체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작업. 진부한 연애 따위는 치우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나와 쿨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려는 내가 공존하는 것처럼.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한 모순이 더 진실되게 느껴졌다.
더욱 발레 연습에 전심전력을 다 했다. 오랜만에 하니까 재미도 있고. 전공할 때는 해 볼 수 없던 연기를 마음껏 발산했다. 발레단에서는 주역만 할 수 있는 연기니까. 마치 한을 푸는 것처럼. 그런데 윤상은 안무가를 본 관객들은 말했다. “그래서 발레 계속할 거에요?”, “이제 그럼 윤상은이 추구하는 발레를 찾으셔야겠네요.” <죽는 장면>으로 활활 태운 후, 이번에야말로 쳐다보지 않으려 했는데 말이다.
관객의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그렇지, 이렇게 던져놓고 버리는 게 아니라 나도 여기에서 더 찾아가야 하는구나.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일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공공예술프로젝트의 한 기획자의 제안으로 진행한 ‘모든 몸을 위한 발레’가 일단은 실마리가 되었다.
<죽는 장면>이 쏘아 올린 질문은 60~70대 시니어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 워크숍인 ‘모든 몸을 위한 발레’로 확장되었다. 날씬하고 젊은 여성과 동일시되는 발레에 관한 이미지를, 대상을 낯설게 바꾸면 상상의 진폭이 넓어지지 않을까? 워크숍에서는 ‘발레에 적합한 몸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만의 발레를 시도’2했다.
나는 발레를 꽤 가르친 편인데, 여기에서는 다른 종류의 진지함이 있었다. 쭉쭉 뻗어야하는 발레와는 다르게 미세하게 떨리면서도 진지하게 동작을 만드는 모습이 빛났다. 발레식 걷기를 연습할 때는 참여자들이 이미 음악과 한 몸이 되어 우아함을 뽐내버린다. 걷기밖에 안 했는데도 거기에 발레만의 우아한 느낌이 나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그들이 주체가 되어 버린 발레였다.
정말 모든 몸을 위한 발레가 가능할까? 다양한 몸, 다양한 춤이 발레라는 장르의 틀 안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시원하고 서글서글하게 대화를 이어가는 윤상은 안무가를 붙잡고 나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생생 춤 정보통’ 진행자가 된 듯한 기분으로 밑도 끝도 없지만, 실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온 질문들을 마구 쏟아냈다.
‘모든 몸을 위한 발레’는 하나의 시도였다. 주어진 시간이 짧다 보니 참여자들이 만족한 걸 가지고 자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장기 프로젝트가 된다면 참여자 각각의 욕구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싶다. 이 춤을 통해서 어떤 욕망이 충족되는지. 발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발레를 통해 내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게 말이다.교육적 관점에서 직접 무용 창작을 해보는 경험이 무용 감상에 도움을 준다고 굳게 믿고 있다. 현대무용의 경우 어렵게만 느껴지고, 너무 추상적이라고들 하는데. 그래서 더욱 움직임이 발생하는 걸 직접 체험하는 게 중요하다. 춤은 몸에 대해서 생각하는 예술 장르다. 몸으로 시작해서 몸으로 끝나는. 그 몸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한 문제이고, 나와 내 몸이 교감하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대상화된 몸으로서가 아니라.
윤상은 안무가 소개 중 ‘박제된 여성 이미지에 운동성을 부여하는 작업’이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발레리나의 순백 이미지, 여성에게 강요되는 전형적인 아름다움, 고정되고 불변의 것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운동성은 청년 여성주의 모임 ‘고양페미’, 무용계 페미니즘 모임 ‘페미플로어’,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 전문 강사 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페미니즘을 처음 접한 게 예술계는 아니었다. 고양시 청년 기본 조례 운동그룹에 참여하면서 그 안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스터디 모임인 ‘고양페미’를 결성한 것이 시작이었다.
페미니즘을 처음 인식하고 공부하기 시작하던 당시에는 예술과 연결되진 않았다. 도리어 일상의 가부장적 관계, 내 삶과 가까운 이야기로 먼저 받아들여졌다. 그러다가 2018년 이윤택 성폭력 사건이 터진 후, 그제야 내가 속한 무용계에도 있었는데 하면서 과거의 것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이 사건을 강 건너 불 보듯 할 문제가 아니구나.
급하게 마련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과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 전문 강사 양성 모집 공고를 보고 이거다, 싶어서 참여했다. 무용 장르 참여자는 윤상은 안무가뿐이었다. 강의안을 만드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교육을 이수하면서 무용계 권력 구조에 대해 찬찬히 돌아봤다. 우리의 입시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지? 교수-학생 관계, 선-후배 관계, 단체 내 관계는 어떤 상황이지? 사례를 수집하고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미숙한 강의를 하고 있지만, 필요한 부분이라는 걸 절감한다. 첫 성희롱·성폭력 예방 강의를 한 대학의 무용과에 가서 했다. 무용과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면서 듣던 게 기억난다. 필요한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태 왜 무용계에서 아무도 생각을 안 한 거지? 싶었다.
2019년에 미술, 인디 음악, 무용 장르가 모여 ‘예술계 행동 강령’을 발표했다. 윤상은 안무가는 동료들과 함께 ‘페미플로어’를 결성해 현장의 약속을 만드는 작업에 동참했다. 예술계 행동 강령을 만드는 작업은 무용계 이슈를 모으는 첫 시작이었다. 당시 무용계 첫 미투 재판도 이뤄지고 있던 터라 방청 연대와 시기적으로 병행되며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행동 강령을 만들어 서로 동의하고 미연에 조심해야 하는 부분을 체크하는 건 중요하지만. 현재로서는 강령이 얼마나 파급력 있게 배포되고 활용되는지는 미미한 부분이라고 평가한다. 예를 들어, 무용 교육 과정 중 ‘지도 시 학생의 몸무게를 측정하거나 공개하지 않으며, 평가에 반영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다. 하지만 이 강령이 학교로 들어가면 과연 지켜질까? 아직은 상징적인 문서의 의미를 가질 뿐, 실질적 반영은 어려운 상황이다.
2021년의 ‘페미플로어’ 활동은 무용계 미투, 성폭력, 무용계 내의 페미니즘 실천이라는 거대한 담론에서 구체적 실천으로 방향을 선회 중이다. 몸, 식이 장애, 비거니즘이라는 키워드가 실태조사, 일기, 대담이라는 형태를 넘나드는 움직임을 기획 중이다.
현재 무용과 시스템은 실기 위주로 테크닉을 끌어 올리다 보니 그 여타의 것에 눈 돌릴 시간을 안 준다. 즉 말이나 언어로 표현할 기회가 많이 없고 그 과정에서 내 감정이 어땠는지, 불편함 같은 감각은 거세당한다. 나는 그게 싫었다. 왜 말을 못 해.
윤상은 안무가는 ‘몿진’ 인터뷰 사상 역대급으로 온라인에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인물이다. 춤 웹진 ‘춤in’에는 ‘떵샤랑 같이 무용공연 보러가요’라는 연재로 무용에 친숙하지 않은 관객과 무용 공연을 본 뒤 나눈 대화를 기록해왔고, 다양한 대담과 기고 글은 물론, 자체적으로 ‘떵샤의 모던댄스’라는 블로그도 운영 중이다. 춤의 사라짐, 춤이 지닌 소멸의 속성은 기억, 기록, 아카이빙하는 작업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을까?
사실 이건 권력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딜 가나 언어가 권력의 최상에 있다. 글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헤게모니를 쉽게 획득한다. 그렇다면 언어가 아닌 것에서 무언가를 획득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과 접근도 무척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춤도 추고 글도 쓰고 오가는 것 같다. 정말 말하고 싶은, 언어화되지 않는 부분을 계속 끌어내고 싶고. 동시에 그걸 풀어내는 방식이 언어인 경우도 있고. 두 가지가 상호보완적으로 가면 좋은데 배타적인 위치에 있을 때가 많다. 이게 한국의 무용 역사 안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인 것 같다.
발레, 무용과, 무용계. 교육과 창작을 기반으로 한 시스템이 얽히고섥혀 있는 세계에 깊숙이 들어갔다가, 껑충 뛰어 필요한 목소리를 존재감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스르륵 좁은 틈을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빠져나오는 윤상은 안무가의 행보는 오늘을 바탕으로 미래의 춤을 상상하게 한다. 블로그의 필명인 ‘떵샤’는 ‘이것은 고양이입니다’라는 뜻의 불어 ‘세떵샤(C’est un chat)’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역할에 관계없이 활동하고 있다. 안무가, 무용수일 때도 있고, 진행이 필요하면 퍼실리테이터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나라는 사람이 그렇다. 널뛰기를 좋아하는 사람. 무용과를 너무 비판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데, 내가 배울 때만 해도 무용과에서는 큰 예술계의 흐름에 무심하고 무용 딱 하나만 봤다. 장르가 충돌하고 연결되고 섞이는 데 관심이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문화예술계라고 엮인 흐름에 끼어드는 걸 좋아한다. 그런 게 언젠가 하나로 만날 때도 있다. 물론 내 작업만 하고 싶을 때도 있다. 창작이라는 세계 안에서 내 언어를 발전시키는 걸 나 역시 좋아하니까. 근데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더라. 약간 대담한 발언일 수도 있는데. 자기 창작에만 갇혀있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이제 잘 볼 수 없다. 다양한 것에 관심을 갖고 넘나드는 태도가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가의 모습인 것 같다.
해외 무용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료의 코로나 19 생활을 담은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떵샤. 이곳에서 불쑥 나타나 순식간에 저곳을 가로지르는 고양이처럼. 이곳과 저곳에는 춤과 글이 자리 잡기도 하고, 발레와 페미니즘이 놓이기도 하고, 나와 당신이 가만히 내려앉기도 한다.
1 <죽는 장면>, 윤상은 안무가, 제3회 페미니즘 연극제 참가작 소개 중 https://sites.google.com/view/femitheatre/home?authuser=0
2 모든 몸을 위한 발레, 윤상은, 제로의 예술 웹진 vol2. https://0makes0.com/webzine/vol2/1/
진행|보코, 소영
기록|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