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만세 ‘내 춤은 아직 연결되지 않은 동그라미’
만세 “내 춤은 아직 연결되지 않은 동그라미”
여섯 살 꼬마는 어느 날 또래 아이들과 함께 우연히 어떤 무대 위에 올랐다. 한 명씩 돌아가며 춤을 추랬다. 꼬마의 차례가 되었다. 춤을 추면서 꼬마는 느꼈다. 자신이 춤출 때 함성이 제일 컸다는 사실을. 상품으로 받은 크레파스를 품에 안고 내려갔다. 꼬마의 아빠는 말했다. “너 진짜 잘했다!” 꼬마는 생각했다. “아, 춤 너무 재밌다!”
10대가 된 꼬마는 한 대안 학교에 가게 됐다. 매주 수요일 아프리카 댄스 워크숍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쿵쿵 마음이 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수요일이 기다려졌다. 수요일마다 친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너 춤 진짜 잘 춘다!” 점점 학교에서 춤추는 시간 말고는 기대되는 게 하나도 없어졌다. 10대가 된 꼬마는 생각했다. “잘하면 재밌는 거구나. 이제 정말 춤만 추고 싶다!”
자신을 춤추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만세의 ‘인생 첫 춤’에 대한 기억이다. 오래전부터 만세가 궁금했는데 몿진도 같이 만드는 사이에 초장부터 인터뷰하면 너무 우리끼리 대잔치처럼 보일까 봐 참았다. 이만큼 참는 데도 오래 걸려서 이쯤이면 되었다, 싶은 마음이 들자마자 만세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정말 춤만 추고 살고 있어?
방학을 앞두고 학교 선생님이 쿨레칸 인턴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주셨어. 난 애초에 여름 방학 동안 어떻게 하면 춤을 더 출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었던 터라 앗싸 개 이득! 그렇게 해서 한 달 동안 쿨레칸의 모든 스케쥴을 따라다녔어. 댄서 개인 연습부터 팀 연습, 퍼레이드까지. 보조 역할을 하기도 하고 춤출 기회가 있으면 춤도 같이 추고 가만히 앉아서 춤추는 걸 보기도 하고. 지금은 쿨레칸 에스쁘아 뿐 아니라, 트러스트 무용단이라는 곳에서 연습하고 있고 ‘자기재생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어.
만세의 하루는 정말 춤으로 꽉 차 있었다. 눈 뜨면 무용단에 가서 연습하고 점심을 먹고 나서는 꼭 혼자서 춤추는 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무용단에 가기 전부터 만세는 곳곳에서 춤을 췄다.
나는 계속 춤 생각을 하는 애였던 것 같아. 그래서 동네 댄스 학원도 가보고 옥상에서 유튜브 따라서 혼자 춤추기도 하고. 내 기억에 춤을 안 췄던 적은 없는 것 같아. 몸 쓰는 것 자체를 좋아하기도 했고. 몸으로 하는 걸 잘하기도 했고 운동도 잘했으니까.
몸 쓰는 걸 좋아했으면 계속 운동이나 다른 몸 작업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춤이었을까.
춤은 좀 달랐어. 운동은 질릴 때가 오기도 했는데 춤은 안 그렇더라고. 춤이라고 하면 나는 무한한 이미지가 떠올라. 춤으로는 다 할 수 있지. 그리고 나는 춤출 때 제일 섬세해지는 것 같아. 하나하나 다 포착하고 싶고 하나하나 다 깨닫고 싶고. 근데 일단 답을 몰라서 계속 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하네.
만세는 자신이 다닌 대안 학교에서 몇 주 전 영메이커 춤 워크숍을 진행했다. 워크숍 소개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어떻게, 어디서 춤출까 궁리하는 데 힘을 너무 많이 쓴 나머지 단단해진 힘을 공유하는 자리. 춤출 생각하면 세상이 너무 퍽퍽해서 슬퍼지는, 동시에 춤추고 있는 나를 보며 위로받는 사람들이 모이는 워크숍’. 하루를 춤으로 꽉 차게 만든 만세의 일상이 처음부터 수월했던 것은 아니다.
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환경이 좀 안 됐어. 춤을 배우려면 기본적으로 돈이 들고. 근데 돈 없어서 춤 못 춘다고 생각하면 너무 속상하잖아. 그래서 무료 워크숍도 부지런히 찾아다니고, 한때 알바도 열심히 해서 돈도 모으고 그러면서 지금은 무용단도 다니지. 여기서는 새로운 재미의 쾌감이 있어. 나는 항상 남을 보고 따라 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나를 보고 따라 하게 된다. 하루도 안 쉬고 단련하는 사람들 보면서 영향도 많이 받고. 현대 무용수가 되기 위한 단계를 내가 밟고 있구나. 남들 다 하는 것 나도 드디어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무용단 연습이 단순히 배움의 갈증으로부터 시작된 건 아니었다. 만세에게는 또렷하고도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다.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은 서울 국제안무워크샵에서 만난 안무가 조스 베이커Jos Baker이다. 조스 베이커의 춤에 뿅 간 만세는 무슨 교육을 받았는지 살펴보다가 벨기에의 현대무용학교 P.A.R.T.S(Performing Arts Research and Training Studio, 이하 파츠)를 발견했다. 오디션이 3년에 한 번 열리는 학교, 마침 그해에 일본에서 입학 오디션이 열린다고 했다.
나는 그냥 올해 열리니까 한 번 볼까 했는데 모두 다 알고 있는 학교인 거야. 그래도 오디션 준비는 열심히 했다. 근데 알고 보니 준비한 방향이 틀렸더라고. 그래서 나중에 내가 발레도 못 했는데 그 학교 오디션 봤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놀라더라고. 그동안 혼자 하면 무조건 된다고 생각했는데 혼자서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내 시간이 너무 속상하고.
파츠 일본 오디션을 준비하던 시기의 만세가 떠오른다. 당시 춤 연습실에서 나는 매주 아침마다 요가를 안내하고 있었다. 만세는 요가가 열리기 몇 시간 전부터 혼자 춤을 연습하고 있었다. 땀을 뚝뚝 흘리며 이어 요가도 하던 만세. 춤을 추면서 가장 불안했던 순간과 짜릿했던 순간을 물었다.
가장 불안했을 때는 파츠 오디션에서 발레 할 때. 내가 아무것도 못 따라 하고 있으니까 그냥 거기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안했고. 가장 짜릿했을 때는 파츠 오디션에서 1분 솔로 끝났을 때. 실은 솔로 안 하고 도망가고 싶었거든. 근데 어차피 이 사람들은 나 못하는 것 다 봤다, 나는 실망하게 할 것도 없고 내 것 하면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1분이 지나고 나니 견뎠다, 드디어 끝냈다 했던 순간이 짜릿했어.
파츠 일본 오디션이 끝나자마자 짐도 풀지 않고 만세는 연습실로 돌아왔다. 우리 모두 어떻게 됐어? 조심스럽게 물어보기도 전에 반짝거리는 눈망울과 앙다문 입술을 씰룩이며 만세는 말했다. “떨어졌어.” 그리고 으앙 작게 울음을 터뜨렸다가 금세 뚝 멈추고 오디션 이야기를 들려줬다. 만세에게는 불안함도 짜릿함도 춤 인생의 같은 자리에 놓여있었다. 앞으로는 어떤 춤을 추고 싶을지 궁금해졌다.
장르를 정하는 건 애매한 것 같아. 물론 내가 만딩고를 배웠고 지금은 현대 무용과 발레에 집중하고 있지만. 솔직히 우리가 추는 것도 완벽한 만딩고는 아니잖아. 오히려 만딩고를 알려줬던 사람인 엠마가 내 인생에 온 것 같아. 내가 혼자서 추는 춤은 만딩고도 현대 무용도 발레도 아니란 말이야. 내가 원하는 춤을 테크닉적으로 제한 없이 더 다양하게 추고 싶어서 지금은 배우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욕심이 나. 춤이라면 다 잘하고 싶어. 아, 답답해, 내 몸 왜 이러지? 이런 느낌 없이 춤을 추고 연기도 하고 그 테크닉을 써먹고 싶은 거야. 무용수로서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은 느낌을 갖고 싶고 기회가 되면 그 이후엔 연출도 해보고 싶어.
만세에게는 인생 공연이 하나 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관람했던 그리스 연출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Dimitris Papaioannou의 <위대한 조련사>라는 작품이다. 만세는 다원 작품이었던 그 공연이 하나의 세계 같다고 말했다. 마치 잘 그린 그림의 한 점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러려면 뭘 보여주고 싶은지가 있어야 하잖아. 그걸 정하는 게 아직은 너무 어려워. 내가 확신이 없으니 이걸 춤으로 보여줬을 때 알아들을까, 망설이게 되고. 아직 내 춤은 미완성이야. 동그라미의 중간을 누가 지우개로 지워서 아직은 동그라미가 연결되지 않았어. 근데 그래서 난 좋은 것 같아. 아직 할 게 많이 남았잖아.
알바하면서는 너무 생각이 많아져서 힘들었는데 혼자 춤출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난다는 만세.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만세는 지금을 위해서 춤을 추는 사람이 아니라 나중을 위해서 추는 사람 같다. 만세의 몸에 차곡차곡 쌓일 춤의 실제와 은유가 기대된다. 지금은 있는 그대로 흠뻑 적시듯 흡수해서 언젠가 몸 안에 함축된 것들을 한 편의 시로 표현할 만세의 어느 날이 기다려진다. 인터뷰를 정리할 때쯤 되자 만세가 말했다.
몿진 인터뷰할 때는 듣는 사람이라서 몰랐는데 막상 내가 말하니까 이상하다. 말하는 사람은 그동안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말이 빠르게 지나가는 느낌이야. 오늘이 내 인생 춤과 관련한 공식 첫 인터뷰인데 고마워.
자리를 정리하며 나도 덧붙였다. 먼 훗날 이 인터뷰를 잊지 말아줘. 그때도 내가 물음을 잔뜩 안고 찾아가면 꼭 너의 춤 이야기를 들려줘.
진행|보코
기록|보코
지삼
5 years ago만세만세만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