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타인의 욕망에 집중하는 행위 – 보코의 춤추며 그러모은 문장들
보코 <춤추며 그러모은 문장들>
4화. 타인의 욕망에 집중하는 행위
동작을 이끌던 엠마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옆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미 엠마의 손짓으로 자연스럽게 둥근 원이 만들어진 상태였다. 나는 간신히 남들을 따라 쭐래쭐래 원의 한 부분을 차지했을 뿐이고. 연주는 어느새 쌔근쌔근 잠든 아이의 숨소리처럼 규칙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엠마의 눈빛을 받은 옆 사람은 빙긋 웃으며 엠마와는 조금 다른 몸짓으로 춤을 췄다. 모두 기다렸다는 듯 그 사람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응? 이게 뭐 하는 거지?
멀뚱멀뚱 있다가 내가 어버버하며 흉내라도 내보려고 몸을 떼자마자, 그 옆 사람은 자신의 옆 사람을 바라보며 사랑의 총알 같은 걸 날렸다. 옆 사람의 옆 사람은 본인의 차례를 환영한다는 표정으로 여유 있는 미소를 띠며 이전 사람과는 전혀 다른 동작으로 춤을 췄다. 그제야 나는 상황을 파악했다. 더듬더듬 따라 하는 척하며 재빨리 머릿수를 셌다. 엠마의 옆 사람의 옆 사람의 옆 사람의 옆 사람. 꼬리의 끝에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동그라미 시작점에서 중간도 못 미치는 지점에 있었다. 즉, 지금 움직이는 사람과 나 사이에는 오로지 단 한 사람만 남아있다는 뜻이다. 금세 내 차례가 돌아온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10초도 걸리지 않았고, 어느 틈에 내 가슴은 규칙적인 연주 박자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콩콩콩 뛰기 시작했다. 어쩌지? 난 뭘 하지?
시간은 분명 평소처럼 흘렀을 텐데 내 세상의 속도만 미친 듯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손을 먼저 뻗을까? 아니야, 다리부터? 아까 몸풀기 할 때 뭘 했더라? 헥헥거리며 간신히 동작을 따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땀이 온 몸의 구멍으로 용솟음치듯 터져나왔다. 마음이 잔뜩 긴장했다는 신호다. 그 사이 내 옆 사람은 슬슬 나에게 바통을 넘길 준비를 하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땅 밑으로 푹 꺼져버리고 싶었다. 어릴 적 좋아했던 만화책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짝사랑하던 여자가 만원 버스 급정차에 넘어져 치마가 뒤집히고 팬티가 보일락 말락 하는 찰나, 오랫동안 아껴두었던 소원을 빌던 남자. 마법사는 남자의 소원을 아주 빠른 속도로 들어줬다. 난데없이 개기일식이 시작되었고 버스 안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사이 여자는 자리를 후다닥 피할 수 있었다는 부러운 결말의 에피소드. 하지만 내 곁에는 그런 소원을 빌어줄 사람도, 달을 움직여줄 마법사도 없었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오롯이 내가 가진 힘을 의심하며 직면하는 일 뿐이었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옆 사람은 해맑게 웃으며 두 팔을 모아 나를 가리켰다. 스무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했다. 순간 멈칫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싶었지만 잘되지 않았다. 다시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열 개의 입꼬리가 높이 올라가 있었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는 춤인지 몸짓인지 뭔지 모를 동작을 하며 겨우 움직였다. 모두 성실히 가까스로 움직이는 나를 따라 했다. 준비되지도, 완벽하지도 않은 나의 동작을 기쁘게 따라 하는 사람들. 이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내 차례가 지나갔는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모두가 돌아가며 자신만의 춤을 춘 후였고, 연주는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리듬이 활활 타올랐다.
그렇게 매주 춤을 추다가 1년 후 어느 날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춤을 추며 웃는 사람들의 표정은 활짝 핀 꽃 같다. 작은 웃음이나 미소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느낌. 하나의 원을 만들어 뱅글뱅글 돌다가 눈을 마주치며 한 사람의 동작을 모두가 따라 할 적에는 타인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진다. 이런 문장도 떠오른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유일하면서 특별한 존재가 되길 욕망한다.’ 나만큼 타인도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기에, 한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을 정도의 집중력을 모두가 발휘해주는 행위. 그 순간, 한 사람의 동작이 얼마나 자유롭고 아름다웠는지 느끼며 따라 움직이는 일은 그 한 사람 뿐만 아니라 나도 자유롭게 만든다. – 2017년 5월”
‘댄스’와 ‘워크샵’사이에 우뚝 자리 잡은 ‘커뮤니티’라는 단어가 가진 힘을 비로소 발견하게 된 날이었다.
(다음 시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