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기운 – 춤추며 탐구한 문장들
3화. 기운
나의 춤 스승 엠마누엘 사누(이하 엠마)는 몸의 중심을 놓치며 흔들리는 나를 보고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자 봐봐.
Look at this.”
엠마는 차렷 자세로 서 있다가 한 손을 공중을 향해 뻗었다. 그리고선 온몸에 힘을 풀었다. 약간 무력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에너지를 싣지 않으면 손끝까지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아.
If you don’t put energy, there is nothing on your hand.”
엠마는 다시 배에 힘을 주고 척추를 곧게 세웠다. 배부터 가슴, 어깨, 팔, 손, 손가락 끝을 따라 우아한 기품이 흘렀다. 조금은 단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다시 봐봐. 에너지를 담으면 모든 게 달라져.
Look again. If you put energy here, everything is changed.”
몸에 에너지를 잘 품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려 했다는 걸 알아 들었는데도, 나는 어쩐지 엠마의 달라진 표정이 웃겨서 한참을 껄껄댔다. 그건 에너지가 아니라 표정이 바뀐 거잖아. 하하하. 집으로 걸어오는 길 그 표정이 다시 떠올라서 하하 웃다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에너지가 달라지면 표정이 바뀌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걷다가 웃음을 뚝 그치고 잠시 멈춰 섰다.
에너지 Energy. 우리말로 하면 ‘기운’ 정도 되겠다. 한자 ‘기(氣)’가 들어간 한자어인 줄 알았는데 순우리말이란다. 15세기 문헌에서부터 ‘긔운’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역시 우리네 조상님들도 기운의 중함을 알고 있었다. ‘기운’의 사전적 첫 번째 정의는 ‘생물이 살아 움직이는 힘’이다. ‘기운이 세다’, ‘기운이 펄펄 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물리적 힘과 정확히 대치되지 않는 어떤 생명력을 목격한다.
기운이 비단 인간이나 살아있는 종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니다. 기운의 두 번째 정의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다른 감각으로 느껴지는 현상’을 뜻하는데 ‘봄기운이 완연하다’, ‘선선한 기운이 주변을 감싼다’ 처럼 뭐라 꼭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시공간이 품고 있는 상태를 표현할 때도 쓰인다. 조금 철학적으로 다가오는 정의도 있는데,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서, 만물이 나고 자라는 힘의 근원’ 역시 기운이라 칭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변화하는 날씨와 계절 속에 나고 자라는 모든 것의 움직임 깊숙한 곳에는 기운이 담겨 있다.
기운이라는 단어에는 ‘기(氣)’자가 없지만 기운 기(氣)에 바탕을 둔 한자어는 많다. 주로 오감으로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몸이 감지하는 상태를 묘사할 때 쓰인다. 가령, 온도와 관련해서 ‘한기’와 ‘열기’라는 말이 있다. ‘한기’는 피부 겉으로 느껴지는 촉각에 의한 차가움과는 사뭇 다르다. 한기가 들 때 우리는 뒷덜미가 으스스하거나 뼛속까지 시린 감각을 체험한다. 열기 역시 단순히 몸의 체온만을 뜻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모여 하나의 목소리를 낼 때, 여럿의 집중과 열망이 한 곳으로 모일 때 우리는 ‘열기가 뜨겁다’, ‘열기가 달아오른다’는 말을 쓴다.
마음이나 욕구의 상태를 의미하는 말도 있다. ‘마음에 느껴지는 기분’을 ‘심기’라 하고,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해내겠다는 의욕과 자신감’을 ‘패기’라 말한다. ‘어떤 행동을 하고자 욕망을 일으키는 마음속 뜨거운 기운’은 ‘혈기’라 하고 ‘활동의 원천이 되는 맑은 정기’를 ‘활기’라 한다. 굳세고 씩씩한 기운은 ‘용기’다. 그런데 용기는 몸이나 마음, 욕구처럼 인간 육체에 기반한 본질적인 것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잘못된 것에 대한 위험이 마음속 생각을 통해 정해졌을 때의 숙연함’을 용기라고 정의한다. 용기는 단순히 강해 ‘보이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에너지, 기운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느낄 수 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당신이 아무런 말과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나에게 호의적인지, 악의적인지, 무심한지 그 낌새를 설핏 알아차릴 수 있다. 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기운을 눈으로 가장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는 몸으로 전하며 움직이는 게 춤이라면, 과연 나는 오늘의 춤에 어떤 기운을 실을 것인가. 같은 춤이라도 누가 추느냐에 달라지는 이유, 같은 내가 추더라도 어제와 오늘이 다른 이유를 어설프게 발견한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에너지를 담느냐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지니까.
글|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