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풀다 – 춤추며 탐구한 문장들
4화. 풀다
춤추기 직전 공들여 보내는 시간이 있다.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춤을 추든 반드시 거쳐 가는 시간이다. 일종의 ‘워밍업warming-up’. 워밍업이란 말은 흔히 운동이나 스포츠 경기에서 주로 쓰인다. 영어 단어의 뜻 그대로 따뜻하게(warm) 몸을 데우고 심박 수를 서서히 높이는 스트레칭이나 준비 운동을 칭한다. 곧 사용하게 될 몸의 여러 부위를 미리 활성화해서 근육의 놀람과 부상에 대비하는 것이다.
춤추기 직전의 워밍업은 신체의 활성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운동 경기에서의 워밍업과는 다르다. 워밍업을 우리말로 바꾸면 ‘몸풀기’ 정도가 되려나. ‘몸을 풀다’에서의 ‘풀다’라는 동사는 다양한 뜻을 지녔다. 다채로운 의미를 하나씩 헤아리다 보면, 춤추는 몸과 마음을 만들기 위한 준비 시간은 정말이지 ‘풀다’는 표현과 가깝게 느껴진다.
먼저, 몸을 풀 때는 ‘긴장 상태를 부드럽게’ 하거나 ‘피로를 누그러뜨려 없앤다’는 의미로 쓰인다. 몸을 풀면서 얼굴의 근육과 표정을 풀고, 경계심과 조바심 같은 마음의 긴장과 피로를 진정한다. 본래 ‘풀다’의 기본적이고 직관적인 뜻은 ‘묶이거나 얽히거나 합쳐진 것’을 그렇지 않은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춤추는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엉켜 있는 실타래 같은 감정이나 무의식 깊은 곳의 매듭을 건드려본다. ‘일어난 감정 따위를 누그러뜨린다’라는 뜻도 있다. 본격적으로 춤의 세계에 뛰어들기 전, 불필요한 노여움, 분노, 오해, 울적함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닌지 살핀다.
몸과 마음의 상태를 누그러뜨린다는 뉘앙스 외에도 ‘풀다’는 존재하던 것이 사라지거나 무언가를 터놓고 늘어뜨리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서도 쓰인다. ‘모르거나 복잡한 문제 따위를 알아내거나 해결’ 했을 때 우리는 앞에 놓여 있던 것이 풀린다. 춤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생의 수수께끼, 인간 존재에 대한 호기심, 눈앞에 들이닥친 현실 문제를 풀기 위해 춤을 진지하게 마주한다.
‘구금을 풀다’, ‘금지령을 풀다’ 같은 표현처럼 ‘금지되거나 제한된 것을 할 수 있도록 터놓을’ 때에도 사용되고, ‘생각이나 이야기 따위를 말할’ 때도 쓰인다. 춤추는 나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 제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보고, 춤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와 생각을 탐색하며 크고 작은 움직임을 시작한다.
어떤 날의 몸풀기 시간에는 짝 짝짝 짝짝짝 짝짝짝짝 늘어나고 고조되는 박자에 맞춰 온몸의 관절에 의식을 두고 움직였다. 발목, 팔꿈치, 손가락, 골반, 어깨, 목, 무릎 등이 구부려졌다가 뻗어 나가는 사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움직임이 탄생했다. 순전히 나의 의지로. 의지가 어떤 흐름으로 파생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내 몸이 기묘하고 낯설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손바닥으로 땅을 쓸던 몸풀기도 있다. 일요일 한낮, 커다란 창으로 나른한 황금빛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는 공간이었다. 둥글게 모여 춤출 준비를 하는 이들과 땅의 기운을 손바닥 위에 끌어모았다. 고개를 좌우 건너편으로 돌려가며 눈빛을 맞췄다. 자신이 모은 기운을 서로의 몸에 뿌려 햇살 샤워를 했다. 햇살에 담긴 온기가 포근하기보단 상쾌했다.
또 다른 어떤 날에는 나비와 함께했다. 나비가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렇다고 상상해보기로 했다. 어깨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걷고 회전하는 사이 나비는 팔을 따라 내려왔다가 가슴에서 날개를 활짝 폈다. 나비를 소중하게 대하며 계속 움직인다. 몸이 사뿐하게 돌고 기울고 이동한다. 나비가 나를 이끈다. 그 사이 가슴이 열리고 팔이 나풀거린다. 어느새 상상 속 나비의 속도에 맞춰 나는 나비를 쫓다 말고 나를 뒤쫓는다.
춤추기 전, 어떤 것은 풀리고 어떤 것은 풀리지 않는다. 어떤 것은 어깨와 목덜미의 뻐근함, 퉁퉁 부은 종아리, 잠을 설쳐 퀭한 눈, 해결하고 싶은 일상의 갈등, 모난 마음, 내가 속한 세계에 관한 물음, 자책감이나 부끄러움 같은 것들이다. 풀렸다가 다시 뒤엉키는 것도 생겨난다. 춤춘 후에야 느슨해진 몸으로 뒤늦게 발견하는 것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함부로 건너뛰거나 생략하지 않는다는 점. 공들여 ‘풀어낸’ 후에야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 있기에.
글|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