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우리 모두에게 느슨한 춤 공동체가 있다면 – 춤추며 그러모은 문장들
25화. 우리 모두에게 느슨한 춤 공동체가 있다면
이렇다 할 사건 없이 하루하루가 흐른다. 아닌가. 마스크를 쓴 콧잔등 사이로 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더위를 피해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노닐 수 없으니 기후 위기는 먼 나라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사는 나의 얘기라는 걸 매일매일 후덥지근한 피부로 실감하는 게 사건이라면 대단히 큰 사건을 겪고 있다고 봐야 할까. 무기력과 함께 주파수가 낮은 마음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이제는 체념에 가깝게, 어쩔 수 없다는 듯 맞이하고 있다.
이 와중에 춤을 춘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하긴 전쟁통에도 사랑은 피어났다고들 하고 서슬 퍼런 정치 상황에도 누군가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농담을 건넸을 테니. 이러쿵저러쿵 입말로 의미를 찾느라 떠들다 지치기 전에 몸을 영차 일으켜 춤추러 간다. 지난 몇 년간 매주 그랬듯이. 그러게 몇 년이나 되었더라. 며칠 전 춤추러 새로 온 이들에게 나를 소개하던 안무가도 헷갈려했다. 음 얘는 여기서 오랫동안 같이 춤춰온 보코라고 하는데 흠 몇 년 됐지? 나도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해봤지만 역시 헷갈려서 살풋 웃고 말았다.
그러다가 춤추며 그러모은 문장들 원고 마감날이 다가오자 갑자기 다시 궁금해졌다. 그러게 얼마나 흘렀으려나. 그렇게 길고 긴 회상을 시작해버리고 말았는데 (글쓰기 싫어서는 아니고) 본디 마감이라는 것을 앞두고 있으면 마감 외의 모든 일이 궁금하고 흥미로운 법.
쿨레칸 무용단을 처음 만난 건 2016년 여름 어느 락페스티벌 잔디밭이었고, ‘저는 춤춰본 경험은 별로 없는데… 춤 배우러 가도 되나요?’ 바들바들 떨며 걸었던 전화를 시작으로 그해 가을부터 거의 매주 춤을 췄으니 올해 햇수로 6년 차에 접어들었다. 중간중간 발목을 삐끗해 깁스하거나, 도무지가 견디기 힘든 생리통이 지나가거나, 길고 짧은 계절 휴가를 떠나던 날들을 제외하고는 나름 부지런히 성실히도 다녔다. ‘가급적 수요일 저녁에는 약속 잡지 않기’에서 ‘수요일 저녁은 웬만해선 절대 안 돼!’로 바뀔 만큼 춤추기는 우선순위가 높은 일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세상에 6년이라니. 누군가 내 춤을 보고 6년이라고…? 애걔걔…? 같은 반응을 보일 게 눈에 선해서 조금 부끄럽지만, 암튼 여기까지 오는데 6년이 걸렸다. 누가 시켜서 했다거나 구체적이고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임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 같다. 진작에 역시 춤은 나랑 안 맞는 걸까, 음 어렵군, 하며 튕겨져 나갔을 것이다.
스스로 마음이 어리다고 느꼈던 시절에는 이것저것 다 해봐야 직성이 풀렸다(이 문장을 쓴 직후 나를 돌아보니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여기로 둥실 저기로 번쩍 손가락으로 찔러 봤다가 발을 뺐다가 하면서 돌아다녔다. 일종의 인생 탐색기라고 여기면서. 마음이 조금씩 자라고 있는 요즘은 하나를 오래도록 끈덕지게 경험해봐야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안다. 그렇게 평생에 걸쳐서 가늘고 길게 느리더라도 꾸준히 가까이하고 싶은 것을 찾아낸다. 지금의 나에게는 춤추기와 요가 수련이다. 둘 다 혼자서 오래 하기 힘들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 춤추는 공간인 ‘쿨레칸 에스쁘아’ 커뮤니티는 난생처음 제 발로 찾아간 곳인데, 운이 좋아 안전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춤을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여기도 사람 모인 곳이라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균열과 갈등도 빚어지지만, 춤출 때만큼은 아무런 생각과 판단 없이 춤을 춘다. 서로의 춤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비교하지 않는다. 그저 춤만 춘다.
댄스 커뮤니티라고 하면 춤을 정말 좋아하거나, 춤에 찐으로 관심이 많거나, 춤을 잘 추는 이들만 모여 있을 것 같지만 생전 춤이랑 거리가 멀었던 이들도 많다. 마치 나처럼. 전문적인 댄서나 안무가 외에 춤추는 공간에서 만난 이들은 다양한 경험과 직업과 정체성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작가, 시민단체 활동가, 연극 연출가, 배우, 타투이스트, 일러스트레이터, 직장인, 대안학교 교사, 출판 편집자, 연구원, 여행가, 생태 활동가, 음악가, 반백수, 자연인, 자유인 등등. 서로가 이렇게나 다양하다는 사실은 춤을 추며 몇 계절을 보낸 후에야 알게 됐다. 첫 만남에 몇 살인지 직업은 뭔지 연애는 하는지 묻지 않았으니까. 대신 자기소개를 할 때는 불리고 싶은 이름은 뭔지, 어떤 마음으로 춤추러 왔는지, 춤을 춰보니 어땠는지를 묻고 귀 기울여 듣는다. 그 외에 함께 있는 동안은 그저 춤을 춘다. 서로를 알아가는 데 있어 말보다 몸으로 먼저 다가간다. 그렇게 춤을 추고 나서 한 주 살아갈 힘을 충전한다. 땀을 흘리는 동안 나의 기운도, 옆 사람의 기운도, 땅과 하늘의 기운도 어쩐지 달라져 있는 듯하다.
모두에게 각자의 취향에 맞는 춤으로 엮인 느슨한 관계망이 있다면 어떨까. 매주 주기적으로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내기 어려운 이들이 일터에서, 동네에서 잠시 잠깐이라도 춤으로 만날 수 있다면. 아마 우린 서로의 신상 정보보다 서로의 몸과 움직임을 더 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와 다르기도 하고 또 같기도 한 타자의 존재를 깊이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 서로가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비슷한지와는 상관없이.
글 |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