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혜진 안무가 “우리는 이미 춤의 힘을 알고 있다 – 신체 주권과 신체 공감”
춤은 몸으로 표현하는 언어다. 다소 상투적이고 추상적인 말이지만, ‘몸’에 방점을 찍어보면 문장이 조금 달리 보인다. 춤을 추는 자는 자신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재료인 몸을 통해 말을 건넨다. 춤을 보는 이는 묵직한 타인의 존재감을 시시각각 감지하면서 춤추는 몸과 움직임을 관찰한다. 때때로 제 것처럼 고스란히 느끼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지식과 정보, 합리적 사고, 논리적 판단 등이 끼어들 여지는 적다. 춤추는 이가 펼쳐 보이는 세계에 접속하기 위해서 보다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감각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춤은 누군가에게는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장르가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장 쉽고 간결한 언어로 통하기도 한다.
‘춤과 힘’을 주제로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춤이 가진 힘, 더 나아가 춤과 힘의 자장 안에 놓여 있는 몸에 대해 탐구해보고 싶었다. 춤이 몸을 경유해 표현되고 전달된다는 점에서 몸은 빼놓을 수 없는 화두이기도 하니까. 춤만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마찬가지로 춤추는 자리에 필요한 힘도, 경계해야 하는 힘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2020년 1월 ‘무용계 첫 미투’라 불린 사건을 공론화하는 데 앞장 섰던 무용인 희망연대 ‘오롯#위드유’에서 활동하며 ‘몸의 주권’을 강조했던 장혜진 안무가가 떠올랐다. 춤의 자리에 머무는 힘, 춤을 추고 안무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감각하는 몸의 주체성에 관해 장혜진 안무가를 만나 이야기를 청했다.
‘신체 주권(bodily autonomy)’이라는 용어는 한국에서 내가 처음 언급한 건 아니지만, 나에겐 익숙한 개념이다. 무용에서 크게 두 차원의 문제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춤을 추기 위해 따라야 하거나 혹은 포기해야 했던 암묵적 약속의 문제이다. 내 신체든, 타인의 신체든 마치 정복의 대상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신체를 굴복 시켜 유연함에 다다르는 건 아름답고 당연한 것일까. 또 다른 하나는 좀 더 미세한 차원이다. 춤추는 사람이기 때문에 고민해야 하는 감각에 관한 것. 우리가 몸을 다 알 수 없지 않나. ‘나는 왜 이렇게 느낄까’부터 몸이 경험하는 순간에 대해 질문하는 것. 신체 주권을 양보하거나 존중하는 방식들이라고 생각한다.
‘내 몸은 나의 것이다.’ 다분히 익숙하고 부정의 여지가 없는 말이다. 하지만 무용수의 신체 주권을 개념적 차원에서 구체적 영역으로 연결 짓기란 쉽지 않다. 몸을 쓰는 예술 장르라는 태생적 한계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막연한 의구심도 든다.
예를 들어 ‘돌아봐’라고 하면. ‘내 몸이 왜?’라고 질문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마련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지시는 대게 명령어로 주어진다. 감각적으로는 골반에 집중해 회전할 수도 있고, 다른 상상도 해 볼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명령적 차원에 좁혀져 있고, 이런 감각이 움직임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 스며있다. 결과적으로 스승이나 안무가에게 신체 주권을 내어준 것이다. 그래서 안전하지 않은 요구나 상황에 대해 무용수가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아무도 나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 적은 없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분위기를 느껴본 적 있을 것이다. 당신이 여성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소수자의 입장이나 갑-을 중 을의 처지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그런 암묵적인 세팅이 존재한다.
장혜진 안무가는 충격으로 남아있는 구체적인 장면을 덧붙였다. 하나는 미국 친구가 전해준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어린이 무용단에 들어가 단원으로 활동했을 때의 경험을 들려줬는데, 공연을 잘 못 한 날은 테이블 밑에 기어들어 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단다. 또 다른 장면은 우연히 본 영상으로, 회사원들을 네발로 기어가게 하는 일종의 회사 체벌 현장이었다.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와 이 영상을 봤을 때 정말 복잡미묘한 모든 게 교차하면서. 성공의 척도부터 인권 유린과 무용수 아이들과 회사원이 느꼈을 죄책감까지. 되게 슬픈 건 두 움직임 모두 춤이랑 비슷하다는 점이다. 기어 다니는 것도 안무적이고. 테이블 밑에서 밥을 먹는 것도 무대에서 있을 법한 공연적인 장면이고. 신체 주권을 뒤집어버리면 그렇게 쓰일 수 있다. 나는 이미 우리가 춤의 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말이 하나의 법이 되어 몸 전체를 지배하는 것.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
질문하거나 고민하기를 멈춰버리면 선언적인 문장은 입버릇 같은 구호에 머물고 만다. ‘몸의 주체성’이라는 관점은 꾸준히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성찰하지 않았다면 하루아침에 느낄 수 없었을 터. 장혜진 안무가는 어떻게 이런 감각을 벼려온 걸까.
무엇보다 내가 그런 오류를 범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가장 소름 돋았다. 선생의 위치에서 미묘한 두려움을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어디까지 들여다보고 제어해야 할지 늘 고민한다. 교육이 일어나야 하는 부분도 있으니까. 흔히 두 사람만 모여도 정치가 있다고 하지 않나. 타인의 신체 주권을 이용하는 일은 정말 자각하지 않으면 정말 쉽게 일어난다. 지하철의 쩍벌남, 누군가 앉을 수 있는 자리에 발을 걸치고 있는 행위처럼 일상적이기도 하다.
타인의 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긍정하는 것. 어쩌면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동작, 무의식적인 습관 속에 내 몸의 주권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살피는 데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혐오의 언어가 판을 치고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는 사건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우리 모두 괴물이 되지 않고 인간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말이다.
어떤 동작을 반복하고 사는가에 따라 정서, 성격,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일깨워주는 부분이 다른 것 같다. 예를 들어 뭔가를 쓰다듬는 일을 하는 사람과 찌르는 일을 하는 사람이 갖는 영혼의 모양은 다를 것이다. 행위만 보고 다 알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쓰다듬는데 마음은 부글부글 끓을 수도 있고, 찌르는 동안 공격성이 해소되어 마음은 부드러울 수도 있고. 어떤 움직임을 내 안에 넣고 사는지가 너무 중요하다. 타인과 나의 몸의 교감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나를 만지지 않은 날과 그렇지 않은 하루는 몹시 다르듯이.
동작과 움직임 속에는 힘이 실려 있다. 힘의 다른 말은 에너지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굳이 입을 떼지 않아도, 에너지는 전달된다.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다. 책을 보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내가 가사를 자꾸 틀렸다. 책이 접혀서 안쪽 글씨가 잘 안 보인 거지.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그걸 알아채고 손바닥으로 반듯반듯하게 책을 쓸면서 펴주는 거야. 그 때 이게 가장 아름다운 움직임이구나, 막 전율이. 예를 들어 아이가 뭘 원하는지 알기 어렵다. 배고픈지. 졸린 지. 하지만 그 사람의 몸을 보고 지금 필요한 환경이 이건가보다, 관찰해 내서 나오는 움직임이 가장 아름다운 움직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내 몸으로 조성하는 것. 미세한 차원으로, 쉬운 말로 설명하자면 ‘신체 공감’.
몸으로 표현하고 설명하고 공감하는 일은 미묘하기에 매혹적이지만, 그래서 어렵기도 하다. 동작과 움직임으로 연결된 춤 또한 마찬가지다.
춤은 무언가의 집합, 결집인데 그 연결성이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맨몸과 맨손이 발생시키는 세계이기 때문에. 춤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움직임에서 움직임으로, 몸에서 몸으로만 전달될 수 있다. 그 순간, 그 공간, 나 자신, 내 마음이 하는 일 혹은 사람 대 사람의 일이다. 문학 속 문장이 하는 것과도 다른 일이고, 그림과도 다른 일이다. 정서적 영역에서 영혼의 깨어남이 있는 것 같다. 춤의 근본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원시에 가깝게. 사라져야지만 성립하는 것.
자연스럽게 대화는 춤만이 가능하게 하는 것, 춤이 가진 힘으로 이어졌다. 춤의 사회적 역할이 있다면, 춤이 전달할 수 있는 힘의 종류는 무엇일까.
춤이라는 게 사실 이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렇게 우리 둘이 앉아 있는데 옆 테이블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말을 해도 이상하지 않고, 노래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데, 춤을 추면 놀라지 않겠나. 관객이 춤을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도 사람이 나와서 말을 안 하고 무언가를 하는 게 이상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나는 그게 정확히 춤의 힘인 것 같다. 나쁘게는 체벌, 의미있게는 대중이 모인 시위 안에서도 몸이 움직이는 것 자체로 분위기를 조성한다. 춤이 가진 위력도 그런 거다. 존재로서 완전히 타격을 받는 게 춤이다. 환기되긴 하는데 답답한 종류의 환기인거지. 이해할 수 없으니까 거부감이 생기기도 하고. 사실은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는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기능할 때 진짜 춤이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거 아닐까.
장혜진 안무가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 안무의 주제를 ‘표류’에서 ‘서식지’로 옮겨왔다. 몇 해 전부터 <미소 서식지>를 주제로 한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에 대해 작업해왔다. 작업을 소개하는 과거의 글에서 자신을 ‘예술가를 서포트하는 예술가’로 언급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표류를 경험한 자가 가진 유연한 감각일까. 존재 자체로 에너지를 전해야 하는 춤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일부분 내려놓고 예술을 고민하는 태도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한국에 온 지 5년이 지났는데 나의 태도를 돌아보는 중이다. 내가 중심이 아니어도 된다는 생각이, 사실 조금씩 실패하고 있다. 욕심이 생긴 건지, 인정 투쟁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해외에서 다양한 이들과 작업하면서 각각이 하나의 행성으로 운동하면서, 동시에 커다란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예술가란 그런 행성 같은 존재가 아닐까. 파이 하나를 가지고 네가 먹으면 내가 못 먹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장혜진 안무가가 처음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그리 소모적이지 않았다. 빠른 템포가 도리어 즐거웠고, 활기찼다. 미국에 오래 머물며 느꼈던 권태로움을 해소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언의 압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중심이 아니어도 된다는 태도를 오해하는 경우도 잦았다.
한국은 일단 네가 보여줘 봐. 이런 게 조금씩 느껴지면서 새로운 스트레스가 생겼다. 그전까지는 예술과 안무가 좋으면, 내가 하든 네가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공존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가 혼자 있을 때 그 섬 안에서도 괜찮을 수 있어야 하는구나 싶다. 최근 코로나 19로 고립을 더 경험하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내 안에서 발견하고 있다. 스스로 내가 하는 일이 의미 있다고 믿어줄 필요가 있다는 것. 어떤 면에서는 더 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쪽으로는 경직되지 않고 말랑말랑한 시선을 유지하고 싶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과 느슨하게 연결된 행성을 나란히 떠올려 본다. 각자의 섬에 고립되어 사는 요즘, 장혜진 안무가가 언급한 ‘행성들이 모인 생태계’에 마음이 기운다. 우리는 각자의 삶이라는 행성을 운용한다. 자신의 몸과 정신과 영혼이 주체가 되어 행성은 자기만의 속도로 움직인다.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빛을 깜빡이면서. 그러다가 다양한 행성들이 서로의 움직임을 발견할 때, 각기 내뿜는 빛이 잠시 연결된다. 찰나와 같은 그 순간, 어둠으로 꽉 찬 우주는 잠시 환해지지 않을까. 춤추는 행성들이 반짝이는 우주를 상상하며 ‘춤과 힘’에 관한 대화를 허공에 힘차게 띄워본다.
진행 ㅣ 보코 소영
기록 ㅣ 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