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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아카이빙] 함께 손을 잡고 멈추지 않는 시간 속으로 – 공연 ‘언제 출 지 몰라서’, 이선시, 2022

그냥 추는 춤은 테두리가 뚜렷한 그림 같았고, 언제 출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추는 춤은 채색이 짙은 그림 같았다. 조금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온 힘을 다해 밖으로 외출하는 것 같았다. 무모하면서도 뜨거웠고, 소중함이 느껴졌는데, 살아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춤추는 우리들을 향해 누군가는 젊음이 느껴진다고도 했다.
– 이선시 <언제 출지 몰라서> 프로그램 북에서

춤을 왜 추냐는 말에 ‘언제 출지 몰라서’라고 답하는 공연을 만났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간절함으로 다가왔다. 새삼 공연과 춤은 반복 재생과 되감기가 불가능한 장르란 걸 깨닫는다. 같은 공연을 여러 날 하더라도 완벽히 같은 공연이란 세상에 없다. 무한히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공연이 만들어지지만 무한 반복하여 관람할 수는 없다. 공연자와 제작진, 관객이 한 공간에서 만나 ‘지금, 이 순간’을 강렬히 몸에 새겨 넣는다. 공연이 발하는 순간의 빛과 이 순간을 위해 달려온 기나긴 시간을 잘 기록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무대 위를 채운 다양한 작업자들의 손길부터 무대 밖 관객을 만나야 비로소 완성되는 공연의 다양한 면면을 ‘언제 볼지 모르는’ 마음으로 남겨보고 싶었다. 2022년 12월, 노을빛이 들기 시작한 늦은 오후, 해방촌 언덕배기에 위치한 댄스 스튜디오 웨이크(Danse club WAKE)에서 이 작품을 만든 이선시 안무가를 만났다.

언제 출지 몰라서, 일 벌린 사람 


소영 : <언제 출지 몰라서>라는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공연을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언제 볼지 모르는’ 절실함으로 다가왔어요.

선시 : 이 작업이 총 세 번 무대에 올랐는데, ‘엠마의 집’에서 처음, 그리고 ‘시댄스(SIDANCE)’에서 두 번째, 이번에 제대로 크게 하게 됐습니다.

소영 : 시간과 공간이 변하면서, 작품은 어떻게 변화한 것 같나요?

선시 : 처음이 개구리였다면, 그다음엔 개구리 뒷다리, 그리고 지금은 발톱인 것 같은 느낌이에요. 너무 깊이 들어온 것 같아요. 하하하.

소영 : 크레딧에 ‘안무’가 아니라 ‘일 벌린 사람’으로 되어 있더라구요. ‘일 벌린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재밌었어요.

선시 : 사실이죠. 일을 벌이는 사람이죠. 지원금을 따고, 공연한다고 사람들 불러 모으고, 관객들 부르고, 지금은 수습하는 사람의 일을 하고 있구요.

소영 : 작업은 언제부터 시작하신 거예요?

선시 : 사업 선정 발표가 2021년 12월 31일에 나서, 제대로는 2022년 1월부터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소영 : 와, 장기 프로젝트인데요.

선시 : 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고요.

소영 : 이 공연은 춤 그 자체에 대한 작품이잖아요. 안무가라면 한 번은 만나야 할 숙제처럼 춤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때가 오는 것 같아요. 

선시 : 스스로 되게 만족하는 작품이긴 해요. 작품 자체의 어떤 의미보다 내가 이걸 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고요. 댄서들과 좋은 추억들이 많이 생겼고, 다들 가족이 됐고 신기해요. 대화 중심의 작업을 오래 했던 동료와는 여전히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라고 인사한다면, 몸을 오래 썼던 사람과는 만나면 바로 안으면서 인사하거든요. 말을 안 해도 이 사람이 다 느껴지고.

소영 : 첫 시작은 어땠나요?

선시 : 희망이 넘쳤어요. 시작부터 하고 싶은 건 명확했어요.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내가 뭔가를 해낸것 같은 느낌을 갖는 것과 나중에 돌이켜 봤을 때 ‘나는 그 나이 때 원 없이 무대에서 하고 싶은 것 했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 제가 계속 작가의 길을 간다면 작품을 많이 하고 살 것 같은데, 아무리 좋은 작품이 많아도 내가 추고 싶은 춤을 추지 못하고 젊은 시간을 보내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요. 억울하지 않은 시간을 한번 만들어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충만함과 충실함


소영 : 멋진데요. 공연을 마치고, 원했던 그 충만한 감정을 느끼셨나요?

선시 : 신체적으로는 그 끝을 본 것 같아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저보다도 멤버들인데, 멤버들 각자가 공연 경험이 많은 친구들이에요. 그동안의 공연과 비교해서 진심이 있었냐, 내가 다 쏟아냈냐는 질문에 대해 저희끼리는 성공적이라고 봤어요. 저도 작품에 관해 아쉬움은 남지만, 신체적으로는 할 수 있는 걸 원 없이 했어요.

소영 : 첫 장면부터 쉼 없이 뛰고, 구르고, 돌잖아요. 볼수록 기분이 이상하게 좋아지더라구요. 나중에 프로그램 북을 보니 ‘기분에 충실한 춤’ 장면이었어요. ‘프로그램에 충실한 춤’, ‘감각에 충실한 춤’, ‘기억에 충실한 춤’, ‘완주를 목적에 둔 춤’, ‘서로에게 충실한 춤’ 등 충실함이 반복되는데, 그 단어의 어감이 좋았어요.

선시 : 무용 학교에서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배우는 게 ‘기본에 충실해야지 대학을 잘 가고, 기본에 충실해야지 상을 타고’예요. 충실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를 무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알아요. 옛날 선생님들이 자주 쓰던 말이었거든요. 그 말에 대한 반항심도 있고, 충실함에 대한 재연이기도 해요.

긴장감을 유발하는 전자음 사이로 다섯 명의 무용수가 꼿꼿한 자세로 서있다. “내가 느꼈던 첫 번째 춤과 무대의 느낌은 바로 이런 느낌이었어.”
간결하고 정돈된 자세로 ‘기본에 충실한 춤’을 보인다. 허리를 크게 구부리며 높이 점프하고, 시간을 늘어뜨리듯 손으로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고, 가볍게 상대를 들어 올려 돌리고, 무대 끝으로 굴러가는 몸들 위를 사뿐히 뛰어 넘고.
하얗게 텅 빈 무대가 댄서들의 다이나믹한 에너지로 채워진다. 점점 음악이 자유로운 분위기로 바뀌며, 춤도 긴장이 풀린다. 각자의 리듬으로 숨을 쉬듯 움직임도 자신만의 스타일로 변해가고, 처음엔 느낄 수 없었던 댄서들 각각의 얼굴이 드러난다. 점점 ‘기분에 충실한 춤’으로 변화한다.
– SCENE #1 기분에 충실한 춤



소영 : 처음 씬에서 몸이 주는 에너지가 아주 크게 전달되더라고요. 일련의 동작이 계속 반복되는데, 어떤 의미가 있을지 궁금했어요.

선시 : 음, 찾자면 의미는 있는데 굳이 의미를 풀고 싶진 않아요.

소영 : 선시님 인스타그램에서 관객분이 태그한 스토리를 공유하며, ‘움직임에서 의미를 찾기보다, 이 움직임을 하는 의미를 생각하면 좋겠다’는 말이 기억나네요.


가장 신선한 과거의 방식, 레트로

선시 : 제가 정말 좋아하는 앙리 마티스 작가 그림 중에 이렇게 손을 잡고 춤추는 그림이 있어요. 또 이사도라 던컨이나 머스 커닝험 같은 옛날 현대무용가들을 보면 한번 쫙 날고, 붕 뜨고, 포물선 같은 걸 그리는 느낌이 있어요. 이걸 작품에 가지고 오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이걸 왜 해야 하느냐란 댄서들의 질문에 저의 답은 ‘레트로’였어요.

소영 : 과거의 것이지만 지금의 시간과 겹치며 딱 맞아떨어지는 거죠.

선시 :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대놓고 점프하고, 기량이나 테크닉을 보여주는 게 좀 촌스러운 게 아닌가란 의문이 들 때, ‘우리는 레트로야’하고 설득했죠. 그때의 움직임을 해서 레트로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게 자신감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서 왜 요즘 친구들이 좋아하는지 알겠더라고요. 내일이 무섭지 않고 현재의 내가 가장 최고인 그 눈빛과 에너지가 인상적이었고, 지금 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소영 : 촌스러움과 멋스러움의 한 끗 차이가 ‘레트로’란 단어에 있는 것 같아요.

선시 : 지금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멤버 지윤과 함께 시작했어요. 어쩌면 이 공연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공격 받을 수도 있겠죠. 공연의 형식이 점점 실험적이고 새로운 시도를 하며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는 반대로 가장 과거의 시스템으로 가보면 어떨까. 커튼도 싹 치고, 어릴 때 봤던 전형적인 무대와 공연으로. 그 공연의 종소리까지 세팅을 한번 해보자. 재밌었던 건 과거의 방식이 지금의 저희에게 가장 신선하다는 점이에요.

 붉은 막 앞에서 하얀색 옷으로 갈아입은 이선시가 관객과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 있다.


움직임의 공동체

소영 : 현대무용에 대해 설명하는 말 중에 ‘10명의 안무가가 있으면 10개의 다른 춤이 있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처음 들었을 때 너무 적절해서 무릎을 탁 쳤는데요. 현대무용은 특정한 동작이 아니라 춤을 만드는 사람의 생각과 개성이 중요한 장르잖아요. 작가들마다 각자 작업을 진행하는 방법도 다르고요. 협업자들과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연습 과정이 궁금합니다.

선시 : 서로 대화한 기록이 천 페이지가 넘어요. 댄서들과의 대화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 1년의 호흡을 함께 했고요. 처음엔 리서치와 워크숍으로 한 달 정도를 보내며 대화를 많이 했고, 그때 충돌도 있었죠. 댄서들이 언제든지 출 수 있는 게 춤인데, 우리 은퇴 작품인가요? 왜 언제 출지 모르지? 라고 물었어요.

소영 : 그렇네요. 댄서라면 언제든지 춤을 추고 있을 테니까요.

선시 : 그때는 설득이 안 됐던 것 같아요. 매번 거의 대화하다 끝나버리니까, 이러다가 언제 출지 모르겠다는 마음을 그때도 느꼈어요. 그래서 한 달이 넘어갔을 때, 뮤직 비주얼라이징처럼 음악을 들으면서 동작이 나오는 대로 계속 출력하기 시작했어요. 약 1시간의 분량을 어울릴만한 댄서에게 하나씩 매칭을 해줬어요. 생전 처음 보는 순서를 몸에 익히는 동안 모두가 예민한 시간을 겪었죠. 당시 뇌과학 박사가 해줬던 조언이 있었어요. 즉흥이나 개념적인 춤에서는 느끼기 힘든 부분이죠. 해냈다, 맞췄다, 외웠다는 성취감과 뿌듯함. 중간 발표가 있었는데, 이번엔 희한하게 작품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기보다, 콩쿨 나가듯이 순수하게 순서와 테크닉을 고민하는데 우리끼리 다 웃었어요. 우리가 이 나이에도 이런 고민을 하는 게 나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뭔가 내 기량이 성장하는 걸 느껴, 이 나이에도 춤이 느는구나. 그러면서 모두 체력적으로 성장하고, 기본기도 다시 세팅되면서, 허했던 뭔가를 채우는 느낌을 저희 스스로 가졌던 것 같아요.


하얀색 옷의 네 명의 댄서가 양 팔을 위로 구부린채  왼쪽 무릎을 높이 들며 힘차게 공중으로 뛰어오르고 있다.


선시 : 배치와 규칙, 반복과 쪼개짐, 헤어짐과 만남 등을 중심에 두고 자연스럽게 긴장감에서 즐거움으로 넘어갈 수 있게 15분 정도로 만든 게 첫 번째 장면이에요. 원래 조금 더 컬러풀하고 에너제틱한데 1시간을 채우려다 보니 좀 약해진 면이 있어요. 모두가 같은 순서로 하나로 세팅돼 있다가 점차 각자의 춤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찾기 위한 시간을 가졌죠. 이 과정을 모든 댄서가 되게 즐거워했어요. 과정에서 모두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났던 것 같아요. 다들 얘기를 많이 나누고 공감하면서 자연스레 공동체가 됐던 것 같아요. 공연을 2주 정도 앞두고서야, ‘언제 출지 몰라서’라는 의미를 알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지금 내가 최선을 다해서 즐기지 않으면, 되게 후회하겠다, 항상 열심히 하는 게 자신의 무용이었다면, 지금처럼 후회 없이 즐기겠다는 마음으로 임한 춤은 없었다. 각자의 다양한 상황들이 겹치면서, 본인만의 ‘언제 출지 몰라서’가 완성되더라고요. 그 주제를 가지고 1년을 반항해오다가, 직전에 그걸 본인이 느끼게 된 것이 저한텐 되게 인상적인 일이었고, 각자의 간절함과 절실함이 너무 고마웠죠.

소영 : 긴 시간 동안 멤버들이 주제에 부딪히는 걸 보면서 공연까지 이어가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선시 : 다행히 좋은 멤버들을 만났죠. 아예 처음부터 작업 만드는 과정 자체를 공유했어요. 의미를 찾느라고 빛을 못 보는 게 있는데, 그것에 빛을 주고 싶다. 그리고 내 감을 믿어보겠다. 이번에 시도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는 감을 꺼내지 않겠다. 하지만 이번에 기회를 안 주면, 감이란 게 아예 사라질 것 같다고요. 모든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작품을 들어가야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를 했고, 그때 믿어줬던 것 같아요. 만약 거기서 날 지금 당장 이해시키라는 반응이 나왔다면 많이 힘들었을 것 같거든요. 또 오히려 제가 찾지 못했던 것들을 이 친구들이 발견하면서 이렇게 협업이 될 수 있단 걸 느끼기도 했어요.

여느 연습때처럼 검정 피케 반팔셔츠와 남색 트레이닝바지를 입은 선시는 동그란 빛으로 경계 지어진 넓은 공간에 덩그라니 서 있다.
걸음을 떼었다가 옆으로 스르르 쓰러지는 동시에 동그랗게 또르르 일어선다. 다양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다. 중력의 무거움보단 다시 튀어오르는 탄성이 강한 움직임이 이어진다. 점점 점프로 변해가며 숨이 거칠어지고 다리는 점점 무거워진다.
멈추지 않고 계속 뛰어오르는 선시에게 무대 옆에서 힘찬 외침들이 들려온다. 파이팅, 할 수 있다. 힘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참을 소리치던 댄서들은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함께 뛰기 시작한다.
– Scene #6 완주를 목적에 둔 춤


함께 추는 사람들 : 드라마투르기, 작곡가

소영 : 공연을 만들 때 ‘객관적인 눈’의 역할을 하는 드라마트루기로 손옥주 공연학자와 협업을 진행하셨어요. 기억 남는 대화는 무엇인가요.

선시 : 드라마투르기 손옥주님과 함께한 게 이번 작업에서 가장 좋았던 점이었어요. 3월부터 함께 하면서 제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상담사처럼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셨어요. 만약 드라마트루기라는 역할이 없었다면 원래 하던 식의 작업으로 방향이 돌아갔을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작업에 대한 의미를 되짚어 주셨어요. 우리가 망각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이고, 이 시대에 무용가들은 어떤 상태이며 이 공연이 어떤 역할을 해주는지. 실패는 나중에 생각하고 계속 밀고 나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죠. 멘토링을 거치며 제 주제가 쓸모없는 주제일 수 있다는 게 가장 충격이었는데, 쓸모없을 수 있는 작품을 그렇지 않게 만드는 역할을 해주셨던 것 같아요. 감수성 중심의 제 생각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필터를 걸쳐 저에게 다시 돌려주셨어요. 


<언제 출지 몰라서>는 개념으로서의 춤이 자타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스스로를 확장시키는 동안에 은폐되거나 배제되거나 망각될 수 밖에 없었던 춤의 실제에 다시금 주목한다. 그것은 몸이 매 순간 예민하게 포착해내는 동(動)의 상태에 귀 기울임으로써, 춤에서 시작된 특정한 몸과 마음의 상태를 다시금 춤으로 회귀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렇게 무대 위의 몸들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불확실한 밀에 기꺼이 손을 건낸 채 지금, 여기에서 각자 자신들만의 춤을 추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예측 불가능한 미래 앞에서 서성이는 관객들과 춤을 매개로 만나고자 한다. 함께 춤추고자 한다.
– ‘춤, 추다’ 드라마투르그의 글, 손옥주(공연학자) 중에서

어두컴컴한 배경 속 푸른 빛이 비치고, 앞으로 걸어가는 댄서의 뒤로 가로로 길게 부푼 커다란 투명 비닐을 두 댄서가 들고 있다. 댄서의 몸이 마치 눈동자처럼 보이며, 비닐은 곧 그의 몸을 감싸기 직전이다.


소영 : 옴브레, 손희남 작곡가와 함께한 음악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특별히 이 공연에서 바라는 작곡 포인트가 있었나요?

선시 :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시되, 공연에서 제가 힘들게 춤출 거라 관객보다 춤추는 사람이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상승하고 힘을 주는 음악을 주세요”라고 했어요. 제가 “생존해야 돼요, 1시간 동안 달릴 거예요”라고 말해서 다들 웃었죠. 곡 전체가 하나로 이어지지 않길 바랬어요. 전혀 다른 작품처럼 음악이 산으로 가고, 바다로 가고.. 여기에 대해선 다들 조금 의아해하긴 했어요.

소영 : 그러게요. 저도 의아해지네요.

선시 : 저의 성향 중 하나인 것 같아요. 한 가지를 계속 볼 수가 없고. 또 대극장에서 언제 출지 몰라서 4개의 작은 작품으로 나눌 수 있게끔 하는 전략도 있었어요. 저는 음악을 먼저 듣고 안무를 짜는 입장이라, 서로 다른 곡을 해야 신나면서 환기가 되고요. 하나의 주제로 1시간 동안 계속 뛰면 움직이는 사람이 너무 지칠 것 같았어요. 사람들이 일관성 없고 너무 꽉 차 있다고 비난할 줄 알았는데, 감정 포인트가 움직이면서 좋았다는 피드백이 많았어요.

소영 : 멜론이나 스포티파이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에 음원으로 발표도 했잖아요. 공연이 끝난 후에도 음악을 들을 수 있어 좋았고, 함께 작업한 음악가들에게도 유용한 결과 같아요.

선시 : 영화나 드라마는 ost가 매번 나오는 반면, 공연은 그렇지 않잖아요. 유현진 피디님이 마침 바로 진행을 해주셔서 생각지 않게 뚝딱 거기까지 간 것 같아요. 또 주변 안무가들에게 소개해줄 수 있는 레퍼런스가 생겨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작곡가분들도 무척 신나 하고, 의미가 있었죠.


배경이 희미하게 비치는 샤막이 내려오고, 무대는 오렌지색 빛으로 가득찬다. 댄서들의 크고 작은 그림자들이 실루엣으로 비친다. 이리저리 공을 튀어 올리며, 자유롭게 내달리는 아이들처럼
손을 잡고, 발을 구르며, 깃발을 나부낀다. 노을빛 아래 짙고 옅은 그림자의 이미지 속에서 어린 시절의 정서를 회상한다. 막이 걷히면, 반짝이는 색색깔과 다채로운 패턴의 옷을 입은 다섯 명이 있다. 쿵하고 울리는 드럼과 박수소리, 희망과 기대감으로 차오르는 신스팝 풍의 음악이 시작된다. 댄서들의 몸과 얼굴에서 에너지가 물결친다. 지금 이 순간에 온 몸을 던지는 용감함과 기세로 무대를 채운다.
– Scene #7 기분에 충실한 춤 Ⅱ


공간과 관객을 만나는 시간 

소영 : 지금까지 공간에 대해 탐색하며, 극장 아닌 다양한 공간에서 춤을 춰왔잖아요. 대극장이란 공간은 어땠나요. 극장의 많은 요소와 장치들을 공연 곳곳에서 볼 수 있었어요.

선시 : 맞아요. 공간을 100% 다 쓰려고 노력했어요! 극장과 대화도 해보고, 한참을 들여다도 봤어요. 대기실과 댄스 플로어가 있어서 댄서들한테 민망하거나 미안하지 않았고요. 쾌적하기도 했어요.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한다는 게 저에게는 꿈이었나 봐요. 그래서 꿈을 이루고 있는 느낌도 있고요. 프로시니엄에서 장면 하나하나 설치할 때마다, 그동안의 공간들이 하나씩 떠올랐는데, 그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었죠. 근데 솔직한 말로 느끼고 이럴 겨를이 없이 지나갔던 것도 같아요.

소영 :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무대 뒤 배경 막이 걷히며 하얀 스크래치가 가득한 오래된 벽이 드러났잖아요. 그때 극장이 거쳐 온 시간과 퍼포먼스가 불러일으킨 시간이 겹치며 좋았어요.

선시 : 운 좋게 서강대 메리홀 벽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제가 생각했던 것을  잘 드러낼 수 있어서 좋았죠. 막을 여러 개 치고 하나씩 올리는 게 원래 계획이었어요. 그동안 가려진 얼굴로 춤을 춰왔다면, 이번엔 진짜 나의 춤을 추겠다는 것이 극장에서 얼굴로 드러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공연 시작 전 빨간 막도 치고, 커튼도 치고, 그렇게 하나씩 걷어 올려져 나가는 거죠. 공연 시작도 막을 올리면서 그 안으로 제가 들어가고.

소영 : 마지막에 관객들의 손을 잡고 무대로 걸어와 이곳저곳을 보여주고, 댄서들과 함께 사라졌다가 커튼콜도 같이 하고 퇴장하잖아요. 무대 위에서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는 관객도 계셔서 깜짝 놀랐어요. 자신의 시간도 함께 겹쳤구나 싶었어요.

선시 : 사람들이 울 거라고 생각을 못했는데, 많이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이 공연은 제 개인적인 얘기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분이 자신의 이야기로 본 것 같아요. 제가 문제를 만든 게 아니라, 상황이 저를 이렇게 만든 거라면 누구든지 같은 상황일 수 있었구나. 나이가 있는 분들은 나는 저 때 저렇게 추지 못했구나, 지금도 늦지 않았을까하는 생각, 어린 친구들은 살아가는 것에 휩쓸려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등을 느낀 것 같아요.

소영 : 프로그램 북에 공연에 참여한 창작진 말고도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가 있어요. 다른 작업에서도 책자의 형태로 기록물을 남겨왔는데, 작업을 할 때 대화가 중요한 부분 같아요.

선시 : 일단 제가 재밌어야 작업을 끌고 가는데, 재밌으려면 알아야 하잖아요. 내 주제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하고, 혼자 고립되어 가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해요. 작품 초반엔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에 대한 방향과 제목 이렇게만 딱 있고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다른 작가들에 비해 준비된 게 적다는 생각에 채워 나가야한다는 강박감도 크구요. 내가 왜 이걸 하고 싶을까 찾아가는 과정에서 제3자와 대화하며 많이 배우고 느끼는 게 즐거워요. 힌트도 많이 받고요.


그 시간을 온전히 느끼기

소영 : 리서치 과정에서 발견한 것들을 관객들과 나눠서 좋았습니다.

선시 : 전시를 보면 언어가 너무 잘 받쳐주고 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무용에도 필요한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소영 : 무용 공연에 대한 관객들의 선입견 중 하나가 ‘이해하기 어렵다’잖아요. 공연마다 감상의 포인트는 다르겠지만 선시님은 어떻게 공연을 보는지 궁금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무용 공연을 볼 때 몸의 에너지가 제 몸으로 다가와 닿는 촉각적인 느낌을 되게 좋아해요. 몸이 만들어내는 에너지 흐름이거나 이미지 속에서 새로운 느낌이나 생각의 연상이 생기기도 하구요. 다른 장르와 달리 무용 공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선시 : 지금 질문을 듣고 보니, 저는 의미를 찾고 보지 않네요. 왜 저렇게 했을까 보지 않고 그냥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 같아요. 내가 느끼면서 어떤 감정이나 기분 등이 바뀔 수도 있는데 그걸 질문하면서 보면 느끼지 못하게 되잖아요. 레스토랑 가서 딴생각하며 먹는 것보다 집중해서 먹어야 맛있듯이, 그냥 그 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뭔지 알아야 될 이유는 없잖아요. 퀴즈도 아니고. 비록 작가가 말하는 거와 다를지라도 보고 싶은 대로 느끼고 싶은 대로 그 사람과 감각을 느끼며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작품을 하려고 했나 보네요. 이제 알겠네. 하하.

빛에 번쩍이는 연두와 파랑, 핑크, 초록, 땡땡이 무늬 등 다채로운 색깔과 패턴의 옷을 입은 다섯 명의 댄서들이
에너지있게 리듬을 타며 한 팔을 공중으로 힘껏 뻗고 있다.

시간은 아끼거나 벌거나 붙잡거나 낭비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 삶의 주인인 마냥 시간을 목적어로 두고 살지만, 삶을 사는 누구에게나 그저 주어지는 것이 시간이다. 우리가 시간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없다. 지금을 충실히 살아내는 일 밖에는. ‘언제 출지 몰라서’ 추고 싶은 춤을 추겠다는 현재의 의지는 지난 기억을 새롭게 되살리고 이 춤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는 희망을 무대 위에 겹쳐놓는다. 이 순간엔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기에 지금을 더욱 풍요롭게 느낄 수 있듯이. 후회하고 걱정하고 계산하기보다 그 속으로 돌진하고, 함께 손을 잡고, 멈추지 않는 춤을 보며 살아야 하는 의미보다 살아가는 것 자체에 빛을 두는 마음을 떠올린다.  

인터뷰 및 글 | 소영 


* 이 글은 원고 의뢰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몿진은 춤과 관련한 기록 작업, 원고 제안 등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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