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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권이은정 무용수 – Go With the Flow


우리는 언제 자신을 스스로  ‘춤추는 자’라고 여길까. 춤추는 사람이라는 자각과 정체성은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그 순간은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뾰족하고 또렷할까? 아니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강물처럼 방울방울 모여 순간을 만들고 다시 흩어지는 것일까? 춤과 시간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겹쳐보자,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의 SNS 프로필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다가 춤이라는 세계에 정착한 이의 궤적을 보여준다. 그의 발자취를 한 줄짜리 요약본으로 훑어본다. 대학교에서 심리학과 통·번역을 전공했다. 페미니스트 저널과 의료복지 사회적협동조합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춤의 세계에 접속한다. 재즈 댄스를 시작으로, 세네갈 모래학교(Ecole des Sables)에서 아프로-컨템포러리 댄스(Afro-Contemporary Dance)를 접하고 여러 차례 부르키나파소, 베냉 등 서아프리카 대륙을 오가며 춤을 배우고 돌아와 배운 춤을 펼쳤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한 나머지, 어떤 종류의 질문은 굳이 묻지 않는다. 그와 몇 차례 대화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함께 춤을 췄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어떻게, 그러니까 왜 춤을 추나요? 

내가 목격한 그의 삶에 춤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것이었기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늘 ‘춤추는 자’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보냈을 시간을 도통 가늠할 수 없었다. 그가 앞으로 나아갈 시간 역시 가늠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큰마음을 먹고 본격적으로 묻기로 했다. 그가 몸으로, 삶으로 겪어낸 혹은 겪고 있는 시간에 대해서. 그의 몸과 삶에 축적된 춤의 서사에 대해서. 그렇게 아프리칸댄스컴퍼니 따그(African Dance Company TAGG)에서 대표로, 아프리카공연예술그룹 원따나라(Wontanara)에서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는 권이은정 무용수와 마주 앉았다. 

나는 흘러가는 것에 저항하지 않는 편이다. Go with the flow. 이런 태도를 한국에서는 좀 특이하게 여기는 것 같다. 정규교육을 받으면 일반적으로 밟아야 하는 수순이 있는데 내가 그걸 안 거쳤으니까. 딱히 특별한 용기가 필요했다거나, 내가 거창한 투사나 자유로운 영혼이어서 가능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좋아하는 걸 따르는 게 자연스러웠다. 




처음부터 춤은 아니었다. 20대는 여성주의자 활동가의 정체성으로 살았다.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 과정을 바로 밟았다. 

석사가 그렇게 공부를 많이 시키는 줄 몰랐지. 들어가서 깜짝 놀랐다. 당시 사는 곳도 고시원으로 막 옮겼을 때였는데. 좁은 곳으로 이사하고, 활동하고, 공부하고, 이렇게 세 가지가 겹치니까 힘들었다. 늘 샤랄라 해맑게 살다가 처음으로 우울증이 왔다. 



어떻게든 움직여야겠다 싶어 운동을 시작했다. 태보(Tae Bo)와 스텝박스라는 지엑스(GX, Group Exercise)를 배웠다. 성취욕이 자극됐다. 강사반 수업을 듣고 ‘토할 만큼’ 운동을 하면서 몸을 쓰는 즐거움과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운동 강사라는 옷도 잘 맞았다. 

이미 영어 강사를 하면서 내가 사람들을 만나고 가르치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운동 강사는 거기에 잘 차려입고 좌중을 압도하며 썰을 푸는 게 더 재밌더라.



이런 저런 종목을 도장 깨기 하듯 거치면서도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았다. 운동이 해방감을 느끼기 위한 수단으로는 딱인데 ‘미학적’인 요소가 없었다. 몸으로, 움직임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활동과 춤 양쪽에 애매하게 발을 걸치고 있다가 완전히 판을 떠나 춤으로 옮기게 된 계기에는 무릎 부상이 있었다. 연골이 찢어져 잘라내는 수술을 하게 됐는데 그때 활동가로서 내 삶을 되돌아봤다. 그동안 나는 여성주의 운동이라는, 인권 운동이라는 ‘이상적인 상’에 나를 맞추려고 노력해온 것이 아닐까. 사람이 생긴 대로 놀아야 되는데. 안 되는 걸 하려다 보니 다리가 부러진 건 아닌지 싶을 정도로(웃음).



재즈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비전공자로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몇 년간 고강도의 테크닉 훈련을 거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여성주의와는 이제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동료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부채감을 동시에 느꼈다.

트레이닝을 거치는 동안 소위 말하는 ‘인권 없는 예술계’의 현실을 봤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도 인권 감수성 스위치를 꺼놓아야 하는 건 아닌지 회의도 들고.



어지럽던 마음의 시기, 우연히 만뎅 덴스(Mandeng dance)와 사바르(Sabar)라는 서아프리카의 새로운 춤을 접했다. 세네갈에 직접 춤을 배우러 떠났다. 한국에서 특이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던 삶이 세네갈에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권이은정 무용수는 춤에 관한 오래된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봤다. 거침없이 꺼낼 타이밍이었다. 


춤추는 사람으로서의 자아가 만들어진 특별한 모멘트는 딱히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기억은 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격렬하게 춤추는 내 모습을 보아왔다는 것. 상상 속 나는 늘 커다란 바지를 입고 땋은 머리를 휘날리며 턴을 돌고 점프를 하고 있다. 그 경지의 순간이 아직 온 것 같진 않고 힘들게 따라가고 있다. 또 하나는 처음으로 무대에 섰을 때의 기억이다. 주변에 긴장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나는 공연이 너무 재미있고 빨리하고 싶었다. 그런 건 춤춰온 경력이랑은 상관없는 것 같다. 왜 그런 사람들 있지 않나. 평소에는 조용하다가도 무대에만 올라가면 생기를 뿜어내는 사람들. 



좋아하는 것을 따라서 온 삶은 활동가에서 무용수라는 새 옷을 입으며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몸에 깃든 감각과 그동안 겪어온 시간의 경험, 인식의 전환이 쉽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나는 활동에서 춤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계속 변명을 해왔던 것 같다. 나는 활동을 멈추는 게 아니다, 하고자 하는 활동을 언젠가는 춤으로 표현할 것이다, 라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웃음). 그래서 춤추는 나를 기억해주고 여성주의 판에, 활동 판에 불러주는 게 너무 고맙다. 조금 면피가 된달까.



권이은정 무용수는 ‘면피’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시공간에 이미 도착해 춤을 추고 있는 그를 자주 발견했다. ‘일하는 페미가 춤춘다’, ‘감정 노동자와 아프리카 만뎅 댄스 워크샵’, ‘페미굿판’, ‘페미시국광장’,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 워크샵’ 등 몸과 마음이 소진되어버린 노동자와 활동가, 싸우다 미쳐버릴 것 같은 여성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그는 주저 없이 달려갔다. 거기에서 만난 여성들의 피로와 분노를 춤이라는 에너지로 바꿔냈다. 최근에는 무용계 미투를 공론화하며 피해자와 연대하는 무용희망연대 ‘오롯 위드유’ 활동에 참여하고, <전사의 땅>이라는 여성주의 현대무용 공연에 무용수로 참여했다. 권이은정 무용수는 그렇게 전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전사의 춤을 추는 여성들의 시공간 경계를 꾸준히 넓혀왔다. 그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내 원동력 때문이 아니고, 백래쉬(Backlash) 때문이다. 법정에 한 번 가면 그 다음은 안 갈 수가 없다. 증인들이 나와서 너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2차 가해도 심하다. 그 자리에서는 무용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피가 끓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공연을 준비하는 내내 계속 사건이 생겼다. 위력이 차고 넘친다는 걸 피해자측이 증명해야 하는데, 그게 형량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밤을 새가며 열심히 자료를 모을수록 가해자가 정당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전사의 땅>에 나오는 장면이 현실에서 흡사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몰입을 안 할 수가 없다. 인위적인 연기가 아니라 현실이니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어쨌든 춤을 춰야 하니까



삶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지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뒤따르기란 쉽지 않다. 차곡차곡 시간을 들여 자기 안의 우물을 들여다보는 일. 마르지 않도록 내면의 샘물을 채우고 또 길어 올려 나누는 일. 부당하고 지옥 같은 현실을 꼿꼿이 마주하며 비껴가지 않는 일. 그런 시간이 쌓이는 동안 슬럼프는 없었을까. 

꽤 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순간이. 하지만 충분히 겪어낼 시간이 없어서 도리어 괜찮았던 것 같다. 일단 매주 ‘하늘을 나는 아프리칸댄스’ 수업이 있기도 하고. 힘든데 수업을 하면 너무 좋다. 버티면서 조금씩 나아가는 것, 제일 중요한 것은 버티기인 것 같다. 방향키만 잘 잡고 있으면 시간은 견디면 된다. 근데 시간을 견디는 게 세상 무엇보다 어렵지. 남의 일일 때는 쉬워 보이는데. 시간이 지나면 사과나무의 사과는 익는다. 하지만 농장 주인 입장에서는 언제 다 익어서 수확하려나 싶은 거지.



권이은정 무용수가 진행하는 ‘하늘을 나는 아프리칸댄스 워크숍’은 어느덧 21번째 수강생을 맞이했다(2020년 10월 기준). 13~17세기 만뎅 댄스와 베냉 등의 서아프리카 전통 춤을 소개하는 동안 춤을 이끄는 안내자로서의 고민 역시 시간과 나란한 속도로 쌓였다. 

초기에는 약간 사명감 내지, 이 춤과 문화가 너무 좋으니까 알려야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건 내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내가 뭘 모르고 너무 일찍 시작한 것 같기도 하고. 초창기 나의 춤 영상을 보면 너무 찔린다. 



몇 년간 서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오가며 현지 무용수를 만나고 다양한 연습을 경험했다. 어떤 지역은 무용수들이 춤 연습을 하는 내내 물 마실 틈도 없이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곳도 있었다. 1군, 2군, 3군으로 춤 실력의 경계가 나뉘어 있는 곳도 있었는데 1군이 아니면 무대에 설 자리도 없었다.

나처럼 아프리카의 춤을 접하고 좋아서 열심히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한국에도 늘어나고 있다.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성급한 면이 크다. 이번 인터뷰의 주제와도 맞닿는 이야기이다. 시간을 좀 더 들여야 한다. 다른 어떤 춤 장르도 (발레도, 현대무용도, 스트릿 댄스도) 외국에서 몇 가지 배우고 돌아왔다고 바로 워크샵을 열고 수업을 이어가지 못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분이 속상하겠지만. 우리는 아프리카에 대해서 좋은 말로 친근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뒤집어 말하면 충분한 리스펙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타 장르에 대한 존중은 몸에 배어 있는데 아프리카 대륙의 문화에 대해서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나도 깨달은지 얼마 안 됐고 여전히 성찰하는 중이다. 솔직히 나도, 내 동료들도 대부분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했으니까. 



권이은정 무용수는 자신의 존재와 역할이 꼭 대학원 시절 배운 통·번역과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춤은 몸의 언어를, 대륙의 언어를, 문화의 언어를 통역하는 일이었다. 

지금 나의 상태는 만뎅 문화의 초보 통·번역사 정도다. 최대한 원본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심성이 있고, 동시에 원본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누군가 오역에 대해 비판하면 겸허히 받아들이려고 하고. 통·번역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배경지식이다. 충분한 배경지식이 있을 때 오역이 줄어든다. 왜 이런 춤을 추게 되었고, 어떻게 이런 동작이 나왔는지 아는 것 말이다. 




자기 삶의 방향키를 쥐고 묵묵히 시간의 속도를 따르며 도착한 곳에서 권이은정 무용수는 꾸준함이 빚어낸 두터움과 새로운 에너지의 반짝임을 함께 품고 있었다. 그 사이 그는 계획에 없던 결혼을 하고 출산을 했다. 시간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그를 데려갔다. 

출산 후 첫 일 년은 너무 힘들었다. 출산하고 2개월 후부터 다시 춤을 췄다. 안 그러면 너무 우울할 것 같아서. 근데 지금은 그 시기에 춤춘 영상은 다시 못 보겠다. 자꾸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출산 과정에서 몸이 변하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인정하기 싫으니 괴로운 거다. 출산 전의 몸 상태와 비슷하게 돌아오는 데 자그마치 3년이 걸렸다.



시간의 흐름은 신체적 변화뿐 아니라 의식, 무의식적 차원의 변화도 동반했다. 여전히 춤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권이은정 무용수가 더 깊은 시간을 통과한 후 흰머리 휘날리는 할머니가 되었을 때 그의 춤을 상상해본다. 그는 춤이 가진 힘에 대해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움직임으로 우울을 극복한 사람이기 때문에 춤의 힘에 대해 꼭 다루고 싶다. 내가 언제 제일 크게 보람을 느끼냐면 아우라가 좁거나 어두웠던 분들이 춤을 통해 환해지고 만개하는 걸 볼 때다. 나는 춤에 있어서만큼은 계속 욕심이 난다. 이 욕심에는 끝이 있다. 현재는 잘 해내고 싶다는 야망과 잘 해내지 못했을 때의 수치심으로 이 욕심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그 끝에서는 치유, 회복 등 다른 방식으로 더 많은 이들과 춤을 추고 싶다.



시간의 연쇄 과정 속 희미해지다가 결국 소멸하는 것이 있다면, 주먹을 꽉 쥐고 지켜내면서 더욱 알알이 단단해지는 것도 있다. 춤을 추는 사람, 춤을 안내하는 사람, 여성주의자로서 권이은정 무용수가 지키는 몇 가지 철칙도 그중 하나다. 

중고등학교 여학생들, 혹은 마음의 상처가 있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수업이나 공연을 할 때는 무조건 여성으로 연주자를 구성하려고 한다. 커다란 북과 젬베를 두드리고 연주하는 것도 여성들이 아주 멋지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데, 실은 여성 퍼포머가 적어서 뜻대로 잘 안 된다. 또 하나는 일부러 몸을 크게 여는 동작을 안내하는 것이다. 만뎅 댄스와 잘 맞는 지점이기도 하고, 움츠러든 여성들에게 필요한 움직임이라고 생각한다. 



2017년 1월 2일, 손과 발놀림이 커다랗고 빠른 춤을 권이은정 무용수에게 배우고 돌아와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 배운 춤은 ‘숭구리바니’ 혹은 ‘타케’라고 불리는 춤이다. 여성의 독립성, 자기방어적 동작이 형상화된 춤이다. 본래 ‘숭구리바’라고 불렸는데 ‘년’이라는 뜻의 비하적 어미인 ‘니’가 나중에 붙으며 해석이 변질되었다고 한다. 춤을 가르쳐 주던 이는 오히려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와 잘 어울리는 해석이다. 그가 활동하는 아프리칸댄스컴퍼니 ‘따그(TAGG)’는 세네갈의 공식 언어인 월로프(Wolof)어로 ‘둥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가 앞으로 품어낼 시간, 몸과 마음이 해방된 이들의 날갯짓이 기다려진다. 

진행 및 기록 ㅣ 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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