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코의 춤추며 그러모은 문장들

19화. 2020년의 춤 일기 – 보코의 춤추며 그러모은 문장들



19화. 2020년의 춤 일기


새로 맞이한 해에는 춤이 어떤 모양으로 뻗어갈 수 있을지 잘 가늠이 안 된다. 지난해의 춤은 분명 울퉁불퉁했다. 일상의 많은 것들이 흐트러지듯,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주춤거리던 나날이 길었다. 삼삼오오 모여 마스크를 쓰고 겨우 춤의 공간을 지키기도 했고, 작은 화면을 앞두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각자의 공간에서 춤추기도 했다. 춤을 둘러싼 세계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는 지금, 지나간 해에 기록한 춤의 일기를 꺼내본다. 코로나 19의 여파가 강해지고 하반기로 갈수록 일기의 여백이 커졌다. 

2020년 1월 8일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못 쓴다. 문자 그대로 몸을 못 쓴다. 생각하느라고.

2020년 1월 15일
하늘을 향해 뻗고 땅을 향해 몸을 낮춘다. 높낮이가 분명한 춤을 췄다. 단단해진 몸은 타자에게 시선을 돌릴 여유를 준다. 타인과 눈높이를 맞춰보는 일. 시선을 같은 곳에 두어 보는 일. 춤을 추는 동안 만큼은 집중해 보았다. 

2020년 2월 5일
움직임의 전환과 이동을 의식할수록 버벅대곤 했는데. 몸에 익은 안무일 경우 도리어 생각을 따라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으며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을 때 완성에 가까워진다. 

2020년 2월 12일
보보동이라는 춤은 농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노동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몸을 쓴다’고 표현한다. 몸을 쓰며 입고 먹고 잘 곳을 마련한다. 나라는 존재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쓰였던 모든 노동의 역사가 나의 몸에 축적되어 있다. 그 축적을 춤으로 꺼내 본다. 

2020년 3월 11일
1년을 넘게 연습해 온 안무가 있다. 요즘은 보보동을 더 자주 춘다. 두 가지 모두 몸에 잘 붙도록 매주 왔다 갔다를 잘 해봐야지.

2020년 3월 26일
멈칫멈칫하다가 오, 된다, 하는 느낌이 들 때 몸통 깊숙한 곳 어떤 구심점이 몹시 요동친다. 

2020년 4월 22일
춤 연습을 2주밖에 안 쉬었는데 몸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일주일에 하루 춤추는 게 엄청나게 큰 활력이자 에너지의 전환, 정화의 시간이라는 걸 다시금 절실히 실감한다. 요즘처럼 고립감이 깊어지는 시기에는 더더욱.

2020년 4월 29일
퇴근길 버스가 너무 꽉 막혀서 한 시간을 늦었다. 중간에 그냥 돌아갈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왔지만, 꾹꾹 눌러 담았다. 끝끝내 도착했다. 막상 움직이니 숨통이 트였다. 

2020년 5월 13일
하루가 춘곤증처럼 나른했다. 온몸이 털털 탈수기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듯 힘이 잘 빠졌다. 춤추는 내내 신나고 가볍고 사뿐한 종류의 기운에 사로잡혀 시간과 공간과 소리와 움직임과 그사이를 가로지르는 에너지에 나를 내맡길 수 있었다. 이런 날은 몹시 드물기 때문에 마음껏 만끽했다. 

2020년 5월 20일
정신을 반쯤 내려놓고 빈자리가 비어 있도록 내버려 둔 채 춤을 췄다. 마구잡이로 뻗어가는 흥이 좋았다. 맑고 깨끗한 것이 빈자리에 스몄다. 

2020년 6월 10일
공연을 준비하며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다. 나의 주춤거림과 두려움이 무언의 방식으로 전해진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다른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느낀다. 오늘 연습은 완성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가늠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들게 했고 습한 날씨 때문인지 빠르게 지쳤다. 

2020년 6월 24일
지난 스트레스의 근원을 찾았다. 누군가가 내가 싸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춤을 즐기고 싶은 마음과 잘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오늘 춤 연습은 정말 좋았다. 정말이지. 이렇게 강한 확신을 갖고 좋았다고 느끼는 날은 흔치 않아서 힘을 주어 적어 둔다.

2020년 7월 29일
드디어 한 곡에 맞춰 긴 안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배웠다. 봄에 시작했는데 장마에 끝났다. 앞부분과 뒷부분을 이어 추고 싶어서 며칠간 몸이 근질근질했다. 거리를 걷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머릿속으로 안무의 순서와 힘의 강약과 디테일의 지점을 떠올렸다. 어느 곳에서도 나는 춤을 출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완성이라는 매듭 그 자체가 주는 감각이 몹시 짜릿해서 계속 느끼고 싶다. 지난 몇 년간은 새로운 안무를 배우거나 춤추기 위한 몸 상태를 만드는 동안 숨이 차면 멈추고 이만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치솟았다. 멈추고 싶지 않은 욕구가 든 건 오늘이 처음이다. 내내 계속 이어졌으면. 딱 한 번만 더 추면 이번에는 완성에 가까울 것 같은데, 같은데 하면서 아쉬워한다. 어떤 생각이 끼어들 틈 없이 춤추는 나만 있다.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2020년 9월 9일
공연을 앞두고 있다. 실패를 반복하는 시간이 연습의 전부다. 함께 참여하는 <이리바>라는 작품은 나무에 관한 이야기다. 내 상상 속 나무와 접속에 실패할 때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진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나무와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작은 바람에 부스스 몸을 떨듯 쉼 없이 크고 작게 흔들리던 커다란 나무 한 그루. 

2020년 11월 25일
공간의 한 지점과 내 몸의 한 꼭짓점이 멀어지면서 그 안에 다른 공간이 생겨난다. 이 움직임은 공간과 나, 공간과 몸, 몸과 몸, 공간과 공간 사이로 연속성을 가지고 흐른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공간의 틈이 머금고 있는 에너지를 담는 공간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그 에너지를 품고 있는 동안 기분이 나아졌다. 코로나 19로 한 공간에 오래 머물면서 혼자 먹고 혼자 일하고 혼자 잠들고 혼자 깨고 혼자 움직이며 몸에 쌓인 무거운 에너지가 겨우 환기되었다. 잘 품어서 다시 나의 공간으로 돌아가야지. 돌아가서 그 공간을 깨워야지. 

2020년 12월 2일
걷다가 쪼개지는 리듬에 맞춰 걸음을 쪼갰다. 때론 함께 걷고 있는 주변 이들의 움직임을 따르며. 누군가의 움직임을 의식적으로 가까이에서 느끼고 그들과 나의 흐름을 맞춰 보는 일이 새삼스럽다. 요즘 같은 시기 춤을 추는 일이, 특히 타인과 한 공간에서 춤으로 만나는 일이 귀하게 느껴진다. 댄스 이즈 뉴-우 투 미. 

2020년 12월 16일
익숙한 이들과 익숙한 공간에서 추는 춤은 마치 현재가 아닌 과거의 춤 같기도 했다. 몸이 곧장 과거의 기억을 소환한다. 다음 주에 우리 또 만나서 춤출 수 있을까. 




Share this with your friends!
Share on Facebook
Facebook
Email this to someone
email
Pin on Pinterest
Pinterest
Tweet about this on Twitter
Twitter
Share on LinkedIn
Linkedin
Print this page
Pri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