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터뷰

[인터뷰] 엠마누엘 사누(1) ‘리듬과 에너지는 내가 원하기 전부터 내 안에 있었다’

지금까지 <몿진>의 이름으로 진행한 모든 인터뷰에 단 한 번도 빠짐 없이 등장한 인물이 있다. 아마 <몿진>의 애독자라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쿨레칸을 만든 안무가이자 무용수, 나에게는 춤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다정한 스승이자 깊은 눈동자를 가진 친구이기도 한 엠마누엘 미가엘 사누 (Emmanuel Migaelle Sanou, 이하 엠마)이다.

<몿진> 인터뷰를 시작한 이래 언제쯤 엠마를 만나서, 무엇을 물어보면 좋을지 오래도록 고민했다. 인터넷 검색창에 엠마누엘 사누를 입력하면 몇 개의 기사가 걸린다. 대부분 2014년 포천 아프리카 박물관의 노동 착취 당사자로서의 발언이다. 그가 경험한 춤의 계보와 예술관을 다루는 기록은 드물다. 4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엠마에게 춤을 배우고, 매주 서로의 호흡과 움직임을 관찰하는 관계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인생에 춤이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가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부르키나파소라는 나라에서 왔다는 것과, 엠마의 춤과 움직임의 시작에는 만뎅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정보 정도가 설명할 수 있는 전부다.

엠마에게 던지고 싶은 물음들이 완성되지 않은 문장으로 입술 끝에 고였다가 사라진다. 나 또한 그의 생을 납작하고 평평하게 왜곡할까 봐 두려움이 앞선 것이다. 고심 끝에 용기를 내어 만남을 청했다. 대화는 순식간에 우리가 이 세계에 존재하기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누군가가 나에게 언제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냐고 물으면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춤을 추고 있었다’라고 답하고 싶다. 음악과 리듬과 에너지는 내가 원하기 전부터 내 안에 있었기 때문에. 만뎅 문화에는 늘 음악과 춤이 곁에 있어. 모든 것이 리듬과 춤으로 연결되지. 



엠마는 동네에서 많은 이름을 가진 아이였다. 이름은 모두 춤과 관련된 것이었다. 잔치 때 흔히 추는 춤인 ‘젬베동’ 순서만 되면 늘 빠지지 않고 춤을 춰서 ‘젬베동 파파’라고 불렸다. 젬베가 울리는 소리를 묘사한 ‘쁘리쁘리쁘랑’도 엠마의 또 다른 이름이다. 쁘리쁘리쁘랑, 하고 피치가 높은 젬베 소리만 들리면 엠마는 어느새 집을 뛰쳐나가고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성당에서 열린 첫 번째 성찬식(Première communion)에서 일상생활에서의 춤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춤을 이해하게 된다. 단순히 즐기는 것을 넘어서 춤이 가진 무게와 에너지에 대해. 

춤을 출 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어. 내 안에는 춤을 즐길 수 있는 에너지가 있었고, 이 에너지는 일상에서 춤을 즐길 때와는 다른 에너지였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때 나는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알았지. 그 이후부터 나는 진짜 춤을 추고 싶어졌어.


깊은 눈동자에…빠져든다



당시 엠마가 살던 부르키나파소의 도시 보보-디울라소(Bobo-Dioulasso)에서는 춤에 관심 있는 청년들이 파티에서 교류하며 댄스팀을 구성하고, 마음이 맞는 팀끼리 지역구별로 열리는 무용 경연대회에 참가하곤 했다. 무용에 대한 방향과 성장을 스스로 고민하던 시기였다. 

경연대회에서 우리 팀은 떨어졌지만, 나의 첫 번째 무용 선생님인 바모 쿠마레(Bamo Koumare)를 만나게 됐어. 경연 대회에서 내 춤을 본 바모가 나를 자신의 팀으로 초대한 거지. 



바모는 엠마와 나이 차이는 크게 나지 않지만, 엠마보다 먼저 춤을 시작했다. 엠마는 그를 자신의 춤 인생에서 첫 번째 선생님이라고 칭했다. 바모는 나중에 엠마와 함께 쿨레칸이라는 무용단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엠마가 합류한 바모의 팀은 경연에서는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매의 눈으로 엠마의 춤을 발견했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열리는 경연 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팀이었다. 부르키나파소에서 열리는 국가 내 무용 대회보다 더 큰 규모로, 말리, 세네갈 등 다양한 국가에서 댄서들이 모이는 경연이었다. 

코트디부아르의 경연 대회를 위해 팀을 더 강하게 만들 사람을 찾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 그래서 합류해서 연습을 시작했지. 근데 적극적으로 제안할 때와는 달리 막상 연습 때는 내 춤이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나 봐. 하지만 어쩌겠어. 시작했으니 나는 그저 열심히 사력을 다해 연습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걸. 



엠마는 처음부터 퍼포먼스의 메인 팀으로 선택받지는 못했다. 연습은 함께 했지만, 퍼포먼스가 시작되면 뒤에 앉아서 지켜봤다. 동료 댄서들의 퍼포먼스를 보고 집에 돌아오면, 홀로 춤을 췄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극적인 가능성은 준비된 자에게 열렸다. 

어느 날 모두가 인정할 만큼 잘 추는 댄서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서 잠시 춤을 쉬게 된 거야.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춤을 추게 됐어. 그날 이후 난 단 한 번도 무대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From that time, I couldn’t sit again because I am try hard and hard. 



때때로 간절한 마음은 단순히 내면의 진정성만으로는 증명되지 않는다. 절실한 욕망은 끝없는 노력 끝에 현실 세계의 빛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팀 안에 머물기 위해서, 선택받기 위해서, 엠마는 스스로 변화를 주면서 성장을 도모했다. 잠깐 맛본 작은 결실은 욕망에 대한 의지를 키웠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춤을 배우고 싶어졌다. 

당시 나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둔 상태였어. 비즈니스를 하는 삼촌 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도 돕고 춤 연습도 병행하고 있을 때였지. 한정된 시간을 쪼개 쓰는 나를 보고 어느 날 삼촌이 말했어.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아주 단호하게. 삼촌이 엄격한 사람인 걸 잘 아니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 고민했지. 그리고 다시는 삼촌의 일터로 돌아가지 않았어.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셨고. 



춤과 리듬이 늘 만뎅 문화의 일상 속에 있긴 했지만, 전문적인 무용수가 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부르키나파소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무용수는 직업적인 정착이 어려운 구조 안에 있었다. 엠마는 이제 막 본격적으로 춤을 배우겠다고 결심한 초심자의 위치에 불과했다. 댄스 컴퍼니, 아카데미, 어느 곳이든 물불 가리지 않고 배우기 위해 찾아다녔다. 일해서 조금이라도 돈을 벌면 바로 춤을 배우러 달려갔다.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는 건 분명히 알았지만 어떻게 컨트롤하는지 모르니 배워야 하잖아. 날마다 아침부터 자정까지 식사할 때를 빼곤 일을 하거나 춤을 췄어. 몸은 피곤하고 아프고, 돈은 없고, 부모님은 이런 나의 결정에 화가 난 상태가 몇 개월 이어졌어. 너무너무 힘들었는데 그 때 옆집에 살던 이웃 여성의 작은 응원과 도움이 몹시 힘이 되었던 것 같아. 그 분이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해. 내 가족을 비롯해서 아무도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나의 예술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는 날이 분명 올 거라고. 자신은 나의 춤을 믿는다고 말했거든. Your art can bring something. She said she believe something in my dance. 


엠마가 10대부터 춤을 연마하던 공간으로 부르키나파소 쿨레칸의 또 다른 안무가 (故) 미슈의 집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는 나날. 주변의 지지가 없다면 고꾸라지기 쉬운 연약한 시절. 엠마는 작은 말이 가진 온기에 기대어 자신을 믿으며 나아갔다. 춤을 더 배우기 위해 부르키나파소의 수도인 와가두구(Ouagadougou)로 갔다. 와가두구에는 ‘흰 개미굴(La Termitiere)’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용 센터(CDC, Centre de Développement Chorégraphique)가 있었다. 그곳에서 엠마는 현대무용가 살리아 사누(Salia Sanou)를 만나 전통 무용과 현대 무용을 배웠다. 

다시 보보로 돌아온 후에도 여러 종류의 무용을 익히고 연습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당시 보보에는 댄서면 누구라도 합류할 수 있는 일종의 문화예술센터인 시라바 센터(Centre Siraba)가 있었다. 유럽권의 안무가를 초청해 서로의 작업을 공유하고 영감을 받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엠마는 이때 부르키나파소의 문화와 역사를 전달하는 프로젝트에 합류해 프랑스 니스와 마르세유를 돌며 공연했다. 

이 프로젝트 컨셉은 부르키나파소의 전통에서 가져온 것이었어. 여기에선 큰 나무 아래 나이 든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어린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전해주는 문화가 있거든. 근데 단순히 말로만 설명하는 게 아니라 춤도 추고 연기도 하고 노래도 불러. 마을마다 나무 아래에서 펼쳐지는 일종의 공연이기도 한 셈이지. 



잠시 나무 아래 옹기종기 앉아있는 아이들을 떠올려본다.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턱 밑까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숨죽여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표정. 손짓과 발짓과 때로는 몸짓 시범까지 섞어가며 자신이 지나온 춤의 궤적을 들려주는 엠마 앞에 벙찐 채로 앉아 있는 내 모습과 닮아있다. 

프랑스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엠마는 말리 문화부 주최로 열린 축제(<Festival sur la Niger>, 2006)에 초청되어 말리의 한 도시인 세구(Segou)에 머물게 된다. 세구에 머무는 동안, 우연히 가까워진 지인을 통해 엠마의 춤 계보에 한 획을 긋게 될 공연 만나게 된다. 

세구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모델 출신의 한 남성을 친구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그는 레스토랑 한 켠에 작은 무대를 설치하고 종종 예술가들의 퍼포먼스를 지원하던 사람이었어. 훗날 그와 가까워져서 나는 그를 모델 파파(papa)라고 불렀지. 나는 어딜 가든 파파가 많아. 하하. 아무튼 그가 내 작업에 관심을 보이고 자신의 무대에 초대하기도 했었고. 그를 통해 사헬 오페라 오디션이 다시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됐어. 



오페라가 시작되면 일반적으로 오디션을 열어서 사람들을 선발한다. 세구에서는 이미 3개월 전 이 오페라를 위한 오디션이 열렸고, 특정 안무 센터의 댄서들을 선발해 간 상황이었다. 하지만 선발된 무용수들은 대부분 이제 시작한 젊은 학생들이었고, 3개월 만에 안무를 소화하기엔 벅찬 상태라서 다시 오디션을 연다는 것이었다.

모델 파파에게 오디션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하루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어. 게다가 오디션이 열리는 도시는 말리의 수도인 바마코(Bamako)라는 곳이었지. 우리는 밤에 부랴부랴 버스를 타고 3시간을 달려 오디션에 참여했고, 나와 내 친구는 결국 선발되었지. 



엠마가 선발된 <사헬 오페라Opéra du Sahel> 4개월간 진행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공연이었고, 이미 3개월이 흐른 뒤였다. 아프리카 춤의 대모라고 불리는 제르멘 아코니(Germaine ACOGNY)가 안무를 맡았다. 남은 1개월 동안 기존의 안무를 익히며 창작도 동시에 해내야 했다. 안무가가 제시한 주제와 컨셉을 이해하고 솔로 파트도 준비해야 했다. 엠마는 이 시간을 지옥 같았다고 표현했다.

제르멘 아코니의 피드백은 혹독했다. ‘너는 지금 움직임만 보여주고 있다’, ‘나는 네 안에 있는 걸 보고 싶다’, ‘나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네 안의 진실을 꺼내라’. 안무가의 냉철한 비판은 자신을 몰아세우면서도 감각을 뾰족하게 벼리는 훈련이 됐다.

이제 내가 뭘 더 보여줘야 하는 거지? 지치고 힘들었는데도 계속 밤마다 연습했어. 아침이면 밤새 연습한 걸 꺼내 보여주고 다시 지적을 듣고. 이 시기의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성장했던 것 같아. 내 안에 있는 것을 어떻게 나만의 힘으로 창조해 내는지 고민하면서 말이야. 나에게는 말을 거는 듯한 움직임이 안무가나 타인에게는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 너무 힘들어서 프로젝트를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 있지만, 결국 오페라가 끝나고 난 후에는 제르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 몸과 감정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걸 끌어내기 위해 어떤 감각을 일깨워야 하는지 고민하다 보니 내 몸은 이미 변화하고 있었으니까. 


프로젝트 <롤로동 Lolodon>, 2008, 프랑스, 눈을 크게 뜨고 엠마를 찾아보자



<사헬 오페라>를 시작으로 무용수로의 이력은 줄줄 이어진다. 프랑스,이탈리아, 포르투갈, 모나코 등을 오가며 엠마는 다양한 안무가, 무용수와 협업하며 각종 작품을 발표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정도인 단기 레지던시 형 공연인 경우가 많았다. 짧은 연습 기간과 순회공연을 마치고 나면 부르키나파소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러다 한국에서 2년 기간의 프로젝트를 준비한다는 정보를 접했다. 유럽에서 참여했던 프로젝트에 비해 안정적인 기간 활동할 수 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먼저 한국에 다녀간 무용수가 전해준 한국이라는 국가와 문화에 대한 이미지도 나쁘지 않았다. 몇 명의 아티스트 친구들과 함께 유럽행 대신 한국행을 결정했다. 포천 아프리카 박물관의 예술가 노동 착취의 당사자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 한 채로. 대한민국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봉쿠라지에서 엠마와 매주 춤을 추는 나는 이 이야기의 끝점과 시작점에 서 있었다. 

(다음 회에 이어서 계속)

진행|소영, 보코
정리|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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