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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침묵하지 않는 춤 ⑤] 루땐 (댄서 루시아, 양말) “퀴어 페미니즘을 사유하며 춤추기”



2021 인터뷰 시리즈 
[침묵하지 않는 춤 – 페미니즘으로 본 춤의 세계] 


다양한 예술 영역에서 페미니즘적 관점과 사유가 확장되고 있다. 퀴어/여성 서사에 주목하는 문학, 페미니즘 연극제, 여성주의로 읽는 미술사 등 위계와 차별에 맞선 창작과 기록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는 끝없이 이어진 문화예술계 미투, 성폭력과 가부장적 폐습을 지적하고 성찰을 요구해온 목소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몸이 주요한 매체이자, 곧 주체이기도 한 춤의 세계는 어떨까? 2021년 한 해 동안 이 질문을 오래 품고 동시대의 춤을 탐구해보려 한다. ‘페미니즘으로 본 춤의 세계’라는 부제를 단 이번 인터뷰 시리즈에서는 성별, 장애, 나이, 외모, 성 정체성, 건강 상태, 사회적 신분 등과 관계없이 차이를 차별로 인식하지 않는 실천 윤리인 페미니즘을 중심에 두고 지금, 오늘의 춤을 살펴본다. ‘침묵하지 않는 춤’은 무용 담론에서 벌어져 왔던 위계와 배제의 구조를 확인하고, 수행적인 예술로서 춤추기를 멈추지 않은 이들에 관한 기록이다.



모방과 동일시의 과정에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개입하면서 보이그룹을 좋아하는 여성도, 걸그룹을 좋아하는 남성도, 보이그룹을 좋아하는 남성과 걸그룹을 좋아하는 여성도, 그 누구의 젠더도 고정적이지 않게 되며 대상을 향한 섹슈얼리티가 이성애적인 것인지 동성애적인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퀴어queer한 순간들이 발생한다 1


퀴어문화축제에서 아이돌 팬덤의 깃발이 나부낀 지는 오래다.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한 이들이 자신이 가장 원하는 모습으로 1년에 한 번 트럭 위, 광장, 거리를 차지하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안 아이돌의 음악은 그 시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 흐른다. 2018년에 이어 2021년 퀴어퍼레이드를 앞두고 진행된 ‘당신의 프라이드 송(pride song)’을 묻는 조사에서 케이팝은 차트의 상위권을 휩쓸었다.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케이팝 아이돌 산업에서 퀴어/퀴어함(Queerness)은 하나의 코드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아이돌-퀴어를 연결 짓는 자장의 한복판에 있는 춤은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할까?

다양한 몸과 정체성을 인식하며 춤추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아이돌 케이팝을 향유하면서 동시에 퀴어 페미니즘을 사유하며 춤추기란 과연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 실천의 방식은 어떠할까? 그 안에 담긴 고민과 성찰은 어느 지점에서 부서지고 다시 마주치며 연결되고 있을까? 현실 세계의 최전선에서 춤추며 이러한 질문들을 마주하고 있을 곳을 찾아가 만남을 청했다. 바로 ‘루땐’이라는 댄스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댄서 루시아와 양말이다. 루땐의 소개 문구에 적힌 ‘퀴어 페미니스트 댄스’라는 단어가 공간을 강렬하게 휘감는다.

양말  춤은 몸으로 수행하는 것이기에 적극적으로 ‘나 자신’으로 설 수 있고, 그 자체를 표현할 수 있다. 수행과 동시에 표현도 하는 것이다. 그런 게 타 예술 장르와 다른 춤의 매력인 것 같다. 자신을 긍정하는 과정. 내 몸으로 어떤 것을 수행하든, 혹은 표현하든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이런 것들을 춤추며 경험할 수 있다.

루시아  몸과 자유로움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했을 때 가장 가능성이 무한한 장르가 춤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자신이 느껴보지 못한 감각으로 스스로를 깨워가는 느낌, 시도해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자신을 만나는 경험, 이런 것들은 정상성 규범에 균열을 낼 수 있다. 페미니즘 안에서 젠더적 규범성에 균열을 내며 자유로움을 감각하는 것이 퀴어 페미니즘이라면, 그걸 표현할 수 있는 게 춤이 아닐까. 춤은 젠더적으로 기호화되어 있는 몸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적극적 예술 장르이기에, 퀴어 페미니즘을 사유하기 좋다고 생각한다.


‘퀴어 페미니스트 댄스 공간’이라는 정의는 굳센 선언처럼 들리기도 하고, 거센 돌풍 사이 무풍지대를 꿈꾸며 휘날리는 깃발 같기도 하다. 안전하게 춤출 수 있는 공간을 찾는 이에게 루땐은 반가운 놀이터이자 해방구일 테다. 하지만 퀴어, 페미니즘, 춤 중 그 어떤 키워드도 제대로 고민해본 적 없는 이에게 루땐은 먼발치의 덩그런 외딴 섬처럼 보일지 모른다.

루시아  이 공간은 모두에게 열려있다. 퀴어 페미니즘 역시 모두에게 열려 있지 않나. 자유롭게 춤추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환영한다. 물론 퀴어 페미니즘을 고민하며 춤춘다는 것을 어렵게 느끼는 분들이 있다. 근데 춤 자체의 장벽 역시 높은 편 아닌가. 루땐에서는 나도 춤출 수 있구나, 이런 경험을 반갑게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중요한 건 당신이 시스젠더인지 퀴어인지 춤을 전공했는지 안 했는지가 아니라,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춤출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양말  퀴어 페미니즘이라는 타이틀이 누군가에게는 편할지 모르지만, 반대로 높은 문턱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완벽한 페미니스트인가?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지도 모르니까. 이런 지점을 어떤 방식으로 편안하게 풀어갈지 고민하고 있다. 함께 춤을 추다 보면 자신의 몸을 거울로 보는 것을 어려워하는 분들이 종종 있다. 때론 춤은 추고 싶지만 바디 쉐이밍(body shaming)이나 젠더 디스포리아(gender disphoria)2를 느끼는 분들도 있고. 이들에게 어떤 대안을 제시하면서 같이 춤추고 나아갈 수 있을지 여전히 이런저런 시도 중이다.


루시아는 2016년 ‘루시아의 댄스 교실’의 줄임말인 루땐이라는 이름으로 첫 춤 수업을 열었다. 처음부터 공간을 운영할 계획은 아니었다. 춤 수업이 하나둘 늘어가고, 찾아오고 싶다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현재의 ‘루땐’이라는 공간이 탄생했다. 활동 중이던 퀴어 댄스팀 큐캔디에서 만난 댄서 양말도 합류했다. 지금은 ‘퀴어 페미니즘’을 내걸고 함께 춤추는 동료이나, 두 사람이 걸어온 춤의 여정은 각기 다르다.

루시아  춤은 어릴 적부터 오래 춰왔는데 배운 적은 없다. 여고 다닐 때 댄스 동아리가 있긴 했는데 여성스러움의 전형을 굉장히 강조하는 곳이었다. 들어가길 꺼리다 마침 퀴어 인권 활동을 하며 만난 친구들과 잘 통해서 청소년기는 함께 춤추며 보냈다. 불안과 공황장애가 있어서 나에게 맞는 공간을 찾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각기 다른 속도에 맞춰 진행되는 댄스 공간은 없을까 고민하다 루땐이 생겨났다. 

양말  어렸을 때부터 발레를 오래 배웠는데, 전공을 꿈꾸다 부모님 반대로 접게 됐다. 청소년기에는 혼자 티비 보면서 춤추다가 성인이 된 후 재즈 댄스, 방송 댄스 등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어느 시점부터 특정 장르의 춤보단, 나의 정체성을 담은 춤을 추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차츰 알게 된 곳이 큐캔디이고, 루땐이다.


춤과 관련한 경험과 기억은 다르지만, 두 사람이 퀴어로서의 정체성과 춤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은 비스듬하게 포개진다.

양말  이분법적 젠더 관념에서 벗어나 춤추고 싶다는 욕망이 어느 순간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여러 장르의 춤을 배우러 다녀보기도 했고. 나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는데, 여자가 왜 이런 춤을 추려고 하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정확히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지만, 적어도 여성적인 몸이 강조되는 방식으로만 춤추고 싶지 않다는 욕구는 분명했다. 이 욕구를 어떻게 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온 시간이 지금 루땐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춤을 안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루시아   어릴 때부터 다양한 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했는데, 내 춤을 보고 누군가는 ‘여성스러운 것도 잘하네’ 혹은 ‘여자애가 맞구나’ 이런 반응을 보였다. 그때부터 사람을 규정짓는 것에 대한 반발과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춤을 출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자연스러운 욕망으로 읽히는 것이 중요하다. 외롭지 않고 싶어서 루땐을 만들었다. 우리 모두 각자 자기 몸과 투쟁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체화된 좋은/아름다운 몸에 대한 강박, 페미니스트로서 이런 몸을 욕망해도 될까, 구조적으로 강요된 욕망 아닐까 하는 의구심, 이런 다양한 것들을 꺼내놓고 함께 독려하는 공간이 필요했다.


루땐은 ‘당신 모습 그대로 춤출 수 있는 곳’을 강조한다. ‘젠더, 외모, 신체 등으로 인한 혐오와 차별 없이 내 모습 그대로 원하는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한다. 당연한 상식이자 태도이지만, 사회에서 온전히 통용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춤추기에 앞서 힘주어 확인하는 경우 역시 드물다.

루시아  다들 다른 곳에 비해 편하게 느끼는 마음과 조심하려는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자각하면 더 긴장하게 되는 것처럼. 좋은 긴장감이라고 생각한다. 루땐은 댄스 교실이기도 하지만 ‘공간’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있는데, 퀴어 페미니즘적 관점을 춤을 가르치는 사람만 지니고 있다고 해서 곧장 자유로워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 그 기준을 ‘함께’ 합의해야 한다. 루땐에서는 고정된 성 역할 수행이 아니라 한 사람 그 자체로 바라봐주는 것, 춤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읽어주는 마음, 그런 게 더 중요하다. 더 자유롭기 위해서도. 


루땐은 활동 규정을 홈페이지에 또렷이 명시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서로를 평등하게 존중하며 대하기, 나이나 실력으로 위계를 만들지 않기, 성별 이분법 안에 발생하는 폭력을 지양하기, 각자의 속도·거리·소속감을 존중하기 등. 안전하고 평등하게 춤추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다. 약속은 서로를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면서 각자의 자유를 찾아 춤추는데 날개가 되어주고 있다.

양말  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안무 대형을 만들 때 가운데 자리를 여러 댄스 학원에서는 ‘셀렉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강사가 잘하는 이들을 셀렉해서 그들이 돋보이게 영상을 찍거나, 실력별로 그룹화하는 것이다. 루땐에서는 주인공이 되고 싶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어 볼 수 있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된다. 누군가 본인의 실력에 위축되지 않고 ‘저 이번에는 가운데 서보고 싶어요’ 용기 내어 말할 수 있고, 함께 춤추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마음에 박수를 보낸다. 개인마다 용기가 필요한 지점은 각자 다른데, 서로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려는 암묵적인 약속, 그런 것들이 있다. 


춤추고 싶은 퀴어 페미니스트를 위한 물리적 공간으로서 ‘루땐’은 확 와닿지만, 퀴어 페미니즘을 사유하며 춤추는 행위는 어쩐지 막연하게 들린다. 루땐의 댄서들은 ‘퀴어 페미니즘’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루시아  일단 페미니즘 안에도 다양한 화두가 있지 않나. 퀴어 페미니즘과 춤을 연결 지었을 때 몸에 관한 이슈가 가장 비중이 크다. 몸의 다양성, 기능적인 몸과 장애 등 교차하는 부분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다. 춤은 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장르다.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도록 춤을 설명하고 있다. 되게 다양한 몸이 다양한 춤을 춘다. 마른 몸, 마르지 않은 몸, 골격이 큰 몸, 작은 몸, 어떤 몸을 가지고 있든, 패싱(passing )되는 정체성이 무엇이든 내가 표현하고 싶은 방식을 춤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니까. 

양말  춤을 가르치는 위치에 선 사람으로서 개개인의 몸 다양성을 인정하고, 본인 모습 그대로 춤춰도 안전하다는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애쓴다. 춤이라는 게 몸을 도구로 삼지만 사실 자신의 어떤 부분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몸으로 수행하는 것 이상의 감정, 에너지, 아우라,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의 욕망 등이 춤에 담긴다. 루땐에서 촬영한 아이돌 커버댄스만 봐도, 실제와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하기보다 사람들이 각기 내뿜고 싶어 하는 기운을 다채롭게 표현하려 한다. 사람들의 기운은 그렇게 획일화될 수 없으니까. 


루땐이 주로 다루는 케이팝 춤은 남성/여성 아이돌로 성별화하여 구분된다. 물론 일각에선 아이돌의 춤과 퍼포먼스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환호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여성 아이돌이 신체를 조금만 화려하고 거친 방식으로 쓰기만 해도, ‘남성 못지않다’, ‘남아이돌 같다’는 평가를 받기 일쑤다. 과연 어떤 춤이 남성적이고, 어떤 춤은 여성적인가? 부드럽고 절제된 움직임 속에서 은은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섹스어필을 하는 춤은 여성적이라 불릴 만 한가? 커다랗고 절도 있는 움직임 속에서 힘을 과시하며 정력을 노출하는 춤이 더 남성적인가? ‘퀴어 페미니즘’의 구체적인 실천은 루땐의 댄서들이 춤을 설명하기 위해 택하는 언어에서부터 확연히 다르게 드러난다. 고전적인 젠더관에 갇히지 않도록 끊임없이 춤을 해석하고 대안적 언어를 고민한 결과다. 

양말  요즘은 여자 아이돌 댄스를 주로 하다 보니 골반이나 가슴을 쓰는 안무들이 많다. 그런 동작 자체를 어색해하는 분들 또한 많다. 그냥 몸은 몸이다, 이렇게 접근하려 한다. 예를 들어 흔히들 ‘골반을 섹시하게 돌리세요’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쓰이곤 하는데. 그 대신 ‘골반을 업’ 이런 식으로 분명히 말한다. 골반을 돌리는 것도 느낌이 다양하지 않겠나. 본인의 느낌을 먼저 찾아보는 게 중요하다. 자신이 가져가고 싶은 만큼 요만큼만 돌릴 수도 있고, 끼부리는 뉘앙스를 담아 엉덩이까지 탁 칠 수도 있고. 아예 하기 싫으면 대신 다른 동작을 제안드린다.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된다. 자신 있게, 자신 있게만 하면 된다.

루시아  나는 비유적인 표현을 좋아해서 느낌을 주로 자연물에 비교하곤 한다. ‘여성/남성스럽다’ 같은 말은 실은 그걸 풀어보면 뭘 말하고 싶은지 더 확실해진다. 어필하고 싶은 부분을 어필하면서, 눈빛은 강렬하게, 부드럽게, 이런 묘사를 단지 ‘여성스럽게’로 퉁 치고 있는 것 아닌가. 만약 여성스러운 파워풀과 남성스러운 파워풀이 다르다고 한다면, ‘치고 나가는 느낌으로’ 혹은 ‘뒤로 모으는 느낌으로’ 이렇게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화날 때 그 감정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 않나. 서운함, 억울함, 짜증남 등등. 구체적으로 말하면 훨씬 더 정확하게 전달된다. 


과연 춤을 통해 몸에 관한 억압, 대상화된 시선, 더 나아가 젠더 이분법을 뛰어넘는 경험과 실천이 가능할까? 어떤 춤 장르나 시도와 한계가 공존하겠지만, 어쩐지 케이팝의 아이돌 댄스에서는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모순되게 여겨진다. 신체와 외모가 대단히 대상화/자본화되었다는 측면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점, 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성 역할과 젠더 편견에서 벗어나 퀴어함을 재현하는 이중적인 속성. 아이돌 춤을 추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양말과 루시아는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루시아  케이팝의 재미있는 점 중 하나는 캐릭터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한 곡의 서사가 분명하고, 굉장히 컨셉츄얼하며, 극적이다. 아이돌 춤을 추면서 여러 캐릭터를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한다는 것 자체가 퀴어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퀴어가 자신의 몸으로 아이돌 춤을 가져왔을 때 달라지는 지점은 정말 흥미롭고 재밌다. 케이팝을 몸으로 수행할 때 젠더적인 것, 젠더적이지 않은 것을 시도하고 소화하는 과정이 어떤 면에서는 드렉과 맞닿아 있다고도 느낀다. 

양말  나는 사실 퀴어와 접목해서 케이팝을 즐기는 놀이 문화에 대해 잘 모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요즘은 여성 아이돌 춤을 커버하거나 가르치는 경우가 많은데, 여성 아이돌 춤을 춘다고 해서 여성스러운 춤을 춘다고 평가받고 싶지 않다. ‘양말의 춤이다’ 이렇게 해석되고 싶은 욕망이 강한 것 같다. 비슷해 보여도 나만의 것으로 재해석해서 춤추고 싶은 욕망. 루땐에서 함께 춤추는 분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루땐의 퀴어 페미니즘은 각 개인의 몸을, 더 나아가 몸에 실린 욕망을 더욱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고려하게 만든다. 아이돌 춤을 매개로 만난 이들은 루땐에서 춤을 추며 변화하는 자신과 타인을 목격하고, 새로운 형태의 관계로 뻗어간다.

양말  루땐에서 꾸준히 춤을 춘 분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못하는 성격이 조금씩 변화하게 됐다는 분도 있고, 제 취미는 춤이에요! 하고 남들 앞에 당당하게 말하게 됐다는 분도 있고. 루땐이라서 이런 도전을 할 수 있었고 또 막상 해보니 즐거웠다는 분도 있다. 그럴 말을 들을 때 굉장히 기쁘다. 해주시는 말이 너무 소중해서. 계속  하고 싶다. 

루시아  춤을 추면서 해방감이나 바디 포지티브(body positive)에 큰 영향을 받은 사람도 있고. 일상 속에서 고립되지 않는 느낌이나, 퀴어 정체성과 관련해 춤추기를 통해 누군가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는 편안함 같은 것도 있다. 어떻게 더 많은 이들이 시스젠더 남성 중심 사회에서 페미니스트이자 퀴어로서 평온하고 건강하게, 자유롭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항상 관심을 두고 있는데 각자가 향유하는 일상이 춤을 통해 더 편안해지면 좋겠다.


춤은 몸으로 춘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가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반문할 수도 있지만 춤만큼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몸을 표현 매체로 삼는 예술은 드물다. 춤추는 이의 몸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춤추는 동안 몸의 상태, 호흡의 길이와 속도, 외형적 크기와 모양, 움직임이 만드는 굴곡 등은 여과 없이 보는 이의 눈동자로 전달된다. 따라서 춤추는 이는 자신의 몸이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지, 무엇을 재현하고 싶은지 끝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더해 춤추는 몸이 빚어낸 감정과 에너지, 언어로는 콕 짚어 표현하기 어려운 감각은 순식간에 보는 이의 살갗에 가 닿는다. 이때 춤추는 몸은 어떤 정의를 가졌는지 더는 중요하지 않아진다. 다양한 퀴어의 신체가 지워지는 사회 구조 속에서 루땐의 침묵하지 않는 춤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춤추는 몸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1 소연(2020), “걸그룹을 퀴어링?”,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 https://fwdfeminist.com/2020/09/02/vol-4-3/
2 성별 불쾌감으로 번역되는 젠더 디스포리아는 출생시 지정된 자신의 신체적인 성별이나 성 역할에 대한 불쾌감을 뜻한다. 이는 자신의 지정성별과 젠더가 성정체성과 일치하지 않아 발생하는 현상이다. [출처:위키백과]




진행|보코, 소영
기록|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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