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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침묵하지 않는 춤 ④] 한석진 무용학자 “페미니즘 무용, 몸으로 더 전복적으로”



2021 인터뷰 시리즈 
[침묵하지 않는 춤 – 페미니즘으로 본 춤의 세계] 


다양한 예술 영역에서 페미니즘적 관점과 사유가 확장되고 있다. 퀴어/여성 서사에 주목하는 문학, 페미니즘 연극제, 여성주의로 읽는 미술사 등 위계와 차별에 맞선 창작과 기록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는 끝없이 이어진 문화예술계 미투, 성폭력과 가부장적 폐습을 지적하고 성찰을 요구해온 목소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몸이 주요한 매체이자, 곧 주체이기도 한 춤의 세계는 어떨까? 2021년 한 해 동안 이 질문을 오래 품고 동시대의 춤을 탐구해보려 한다. ‘페미니즘으로 본 춤의 세계’라는 부제를 단 이번 인터뷰 시리즈에서는 성별, 장애, 나이, 외모, 성 정체성, 건강 상태, 사회적 신분 등과 관계없이 차이를 차별로 인식하지 않는 실천 윤리인 페미니즘을 중심에 두고 지금, 오늘의 춤을 살펴본다. ‘침묵하지 않는 춤’은 무용 담론에서 벌어져 왔던 위계와 배제의 구조를 확인하고, 수행적인 예술로서 춤추기를 멈추지 않은 이들에 관한 기록이다.



사회적 실천으로서 페미니즘 무용은 페미니즘 의식을 갖추고 실현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여성무용가의 작품에 한정되거나 여성을 주제로 한 모든 작품을 의미하지 않는다. 페미니즘 무용은 성차별과 억압, 불평등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보여주면서 비판하거나 이러한 사회적 구조와 관념에 의해 재현되는 젠더 정체성, 섹슈얼리티, 신체 이미지를 해체시킨다 1


‘페미니즘으로 본 춤의 세계’라는 다소 거창한 부제를 내건 이 시리즈를 기획한 후,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바로 틈날 때마다 빈칸에 ‘페미니즘’과 ‘춤’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넣어보는 일. 포털, 언론사, 도서관, 서점, SNS, 논문 사이트까지 어디든 검색창이 열리면 일단 두드리고 본다. 무용계 현안에 대응하는 눈에 띄는 몇몇 활동 외에는 흐름을 포착할만한 자료가 드물다. 1990년대 후반 연구물 중 페미니즘과 춤을 연결 짓는 시도가 보였지만, 그마저도 무용에 대한 서구적 해석의 답습이거나 특정 작품만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두 단어를 ‘여성주의’와 ‘무용’으로 바꿔 보아도 매한가지다. ‘페미니즘’과 ‘아트’, ‘여성주의’와 ‘예술’을 포개었을 때 광막한 평야처럼 펼쳐지는 정보의 형태, 가짓수, 다양한 기록 주체 등에 비해 춤에 관한 기록은 상당히 한정적이다. 

페미니즘 관점과 춤에 관한 논의는 1990년대 말 세기의 종말을 두려워하며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의구심이 피어오를 무렵, 한 편의 연구물을 발견했다. 무려 2021년 발행된 따끈따끈한 글. 한석진 무용학자의 논문이었다. 무용학회를 통해 연락처를 수소문했다. 흔쾌히 성사된 만남에서 대화는 순식간에 본론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니까 대체 무용계에는 무슨 일이…?

흠… 먼저 구조적으로 접근해보자면, 타 예술 장르에 비해 초·중·고등학교에서 무용은 교과목으로조차 만날 일이 적다. 문학, 미술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와 음악은 일상적 접근이 쉬운 데 반해, 무용은 경험의 기회가 너무 드물다. 거기에 소수만 할 수 있는 예술 매체라는 인상도 강하다. 연구하는 사람으로서는 무용계가 여전히 고급예술, 순수예술을 지향하면서 발생하는 수직적 위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전적 기준 안에서 연구 가치를 정하다 보니, 대중 춤은 연구 대상으로 잘 다뤄지지 않는 경향도 있다. 이론을 공부하는 동안, ‘무용은 실기지’ 이런 태도를 가진 이들도 많이 봤다. 춤에 대한 직접적 경험만이 춤을 설명할 수 있으며 언어화는 춤의 ‘진짜’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인식. 근데 이건 정말 옛날 옛적 사고방식 아닌가. 다행히 지금은 조금씩 변화하는 추세다. 


한석진 무용학자는 예술대학에서 무용 이론을 전공했다. 사람들은 춤을 어떻게 이해할까. 단순히 감정적·정서적 접근이 아닌 사회적 맥락, 미학, 철학과 연관 지어 춤을 읽어내는 게 흥미로웠다. 창작자의 일대기나 작품을 쫓는 작업보다는, 춤을 추는 공간에 발생하는 권력 관계에 늘 눈길이 갔다. 춤을 마주한 시간 동안 몸에 쌓인 경험과 기억이 자연스레 관심의 방향을 이끈 것이다.

무용 이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까지, 학창 시절에는 발레를 전공했다. 당시 페미니즘에 관한 뚜렷한 인식은 없었지만, 내 몸을 타자화하는 것은 익숙했다. 발레라는 춤 특성상 이상적인 몸의 형태가 존재하니까. 발레의 테크닉을 훈련하면서 내 몸을 규정짓는 방식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물론, 단순하게 발레라는 장르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부정하거나 대립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발레의 시초에는 유럽 백인 남성의 시선과 대상화가 있었지만, 규정된 여성성과 남성성, 이성애적 규범에서 벗어난 작품도 있기 때문이다.


한석진 무용학자가 2021년 발표한 논문의 제목은 <1980년대 이후 한국 페미니즘 무용의 계보 및 지형 모색>이다. ‘한국 페미니즘 무용’이라는 표현이 선언적으로 읽힌다. 대체 무엇을 ‘페미니즘 무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아시다시피 한국에는 페미니즘 무용에 관한 자료나 이야기나 워낙 없다. 방대하고 다양한 결의  작품을 하나로 묶는 게 무리일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질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야 그다음 누군가 받아서 또 다른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 테니. 대체 페미니즘 무용이 뭐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단지 여성이 만든 작품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연구자로서는 무용 작품에 페미니즘적 실천이 담기거나, 사회 구조에 의한 지속된 젠더, 섹슈얼리티, 신체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라면 페미니즘 무용으로 정의 내렸다. 안무가 스스로 페미니즘적 작품은 아니라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작품에 드러난다면 보는 이가 충분히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 선정이 지나치게 주관적인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는데, 그래서 더욱 이론적 타당성과 근거를 고려해 풀어내려고 애썼다.


논문이 발표되기 전, 한석진 무용학자는 같은 주제와 내용으로 <텔유어바웃허: 80년대 이후 한국 페미니즘 무용>이라는 전시를 통해 대중을 먼저 만났다. 페미니즘이 무용 예술계 안팎으로 활발하고 중요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전시를 기획했다. 

큐레이팅이 나의 본업은 아니다. 연구가 하나의 작업을 언어로 정리하면서 관점을 만드는 일이라면 큐레이팅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연구자의 논문은 접점을 넓히기에는 제한적이다. 논문은 결국 보는 사람만 볼 테니까. 다양한 이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필요했다.


무용이 연구계 밖으로, 극장 밖으로 나가 다른 공간에 머무는 동안 이슈는 더욱 풍성하게 다뤄질 거라  기대했고 예상은 적중했다. 전시에는 무용계 연구자, 창작자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젊은 층 관객도 많았다.

무용에서는 지금 무슨 얘기하고 있나? 많이들 궁금해하는 걸 보면서 이런 논의가 필요했구나 싶었다. 전시의 파급력을 실감하기도 했고. 논문은 그동안에도 많이 발표했는데 말이지(웃음). 넓고 다양한 대상과 관객을 만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다만, 워낙 방대한 기간과 내용을 다루다 보니 전시에 아쉬움도 남는다. 주제적인 면에서는 춤과 페미니즘을 다뤘지만, 형식적으로는 충분히 접근하지 못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언어화되지 않는 경험이나, 여성적 경험을 전시 형식에 어떻게 녹여낼 수 있을까. 매체에도 위계가 있는데 언어는 오랫동안 남성, 이성의 영역으로 여겨졌고 언어화되지 않는 경험은 열등한 위치에 놓인 역사가 있지 않나. 이런 부분을 전시 형식에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지 더 고민해보고 싶다.


전시의 기획자 한석진 이름 옆에는 무용학자와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나란히 적혀있다. 보통 큐레이팅하면 미술관의 미술 작품이 먼저 떠오른다. 물성을 가진 것. 누구나 몇 번이고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고정된 물성을 지니지 않는 무용을 큐레이팅한다는 접근은 다소 생소하다. 춤은 한 번 추고 나면 휘발되기 마련이고 동일하게 재현되기란 불가능한 것 아닌가. 이런 물음에 한석진 무용학자는 무용의 ‘원본’의 개념을 지적했다.

같은 무용 공연이라 해도 낮과 밤이 다르고, 초연과 그 이후도 다르다. 그럼 과연 언제를 가장 완벽한 공연이라고 볼 수 있을까. 원본은 어디에 있는가? 춤을 경험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원본이 우위에 있고 나머지는 부가적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춤이 다양한 경험을 전할 수 있는 이유는 춤 자체가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시에서는 춤의 휘발성에 집중해 무용 작품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작품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지 전달하고 싶었다. 한국처럼 한 번 공연 하면 재공연이 힘든 분위기에서 혼자 창작하고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사라지는 작업도 많다. 무용을 경험하는 다양한 방식, 무용을 통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여러가지 이벤트가 필요하다. 동시대적으로는 경험과 해석을 공유하고, 역사적으로는 기록에 남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춤은 춤추는 이의 몸을 통해 표현되고 전달된다. 춤추는 몸에는 타인이 평소 손쉽게 알아차릴 수 없던 내면이 깃들어 있지만, 몸을 둘러싼 환경과 가치관, 몸에 축적된 사회적 경험 또한 도사리고 있다.

춤을 흔히들 개념화·언어화되지 않는 원초적 예술이라고 말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무용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은 신체를 바라보는 인식과 연결된다. 남성과 여성, 이성과 감정, 정신과 신체를 분리해 남성-이성-정신을 상위 가치로 두었던 사고 안에서, 신체가 항상 동반되는 예술인 무용은 생물학적 여성에 대한 인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마치 여성은 이성적인 사고가 단절되고 감정적 존재로만 여겨졌던 시대처럼.


누군가 춤을 춘다. 그 춤을 또 다른 누군가 본다. 춤이 발생하는 순간, 춤추는 이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이 뒤따른다. 춤추는 이는 자신의 춤을 바라보는 자의 시선을 통해 다시 자신의 몸을 바라본다. 그렇게 춤추는 몸은 주체성과 객체성을 동시에 품는다.

무용은 신체가 집약되어 드러나는 예술이다. 무용에서 페미니즘적 접근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신체에 주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무용계 역시 심각한 성차별과 위계가 작동하고 있다. 무용사에서는 여성 무용수가 변화를 주도해온 흐름도 강하고, 여성 무용수의 비율도 월등히 높지만, 반면 안무가 등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는 남성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걸 읽어내고 변화를 만드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다만, 타 예술과 달리 무용은 사회가 신체를 어떻게 다루는지 집약적이고 상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장르이다. 사회에서 몸은 왜 이런 시선으로 읽히는지, 몸과 몸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무용은 몸으로 질문을 던지고 성찰의 지점을 만든다. 그 과정에서 몸을 타자화하는 방식은 더 적극적이고 전복적일 수 있다.


춤으로 던진 물음은 누구에게 가닿고 있나. 춤만이 펼쳐 보일 수 있는 세계는 현재의 무엇을 건드리고 또 바꾸고 있는가. 아직 우리 앞에 도래한 적 없는 미래의 춤을 떠올려본다. 내 몸이 나로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음을 언어가 아닌 몸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춤. 내 앞의 타인 역시 나와 같은 몸, 혹은 나와 다른 몸, 더 나아가 부분적인 몸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춤. 지금의 내 몸으로 도달해 본 적 없는 경험과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는 춤. 그 때는 어쩌면 무엇이 페미니즘 무용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해석 하는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를 꿈꾸며 성찰과 실천을 게을리하지 않고 춤을 보거나 춤을 추거나 춤을 만든다면 말이다. 차별의 관점을 단호히 거부하고, 타자를 손쉽게 대상화하지 않고, 나아갈 세계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덧대는 춤, 곧 다가올 그 춤을 만나고 싶다. 그 때까지 춤에 관한 기록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1 「1980년대 이후 한국 페미니즘 무용의 계보 및 지형 모색」, 한석진, 『한국예술연구』제 31호, 2021.





진행|보코, 소영
기록|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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