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터뷰

[인터뷰] 이선시 안무가 – 춤이 발생하는 공간

공간(空間)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아무것도 없는 빈 곳 (2) 어떤 물질이나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 (3) 영역이나 세계를 이르는 말. 

여기, 텅 빈 곳이 있다. 길을 걷다 문득 이런 곳이 있었나 하며 발견한 작은 공터다.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으나 폐업을 선언한 지금 모든 집기가 빠져나간 임대 건물이다. 암전으로 완벽한 어둠과 화려한 조명으로 시선을 잡아끌던 공연장의 무대다. ‘외부인 출입 금지’ 안내문이 1년 내내 바람에 나부끼는 학교의 운동장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던 자리였고,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영역이자 전부인 세계였다. 요즘 우리가 마주하는 공간의 모습이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고 여겨지는 곳에도 무언가가 존재한다. 공터에 흐트러져 있는 조약돌과 마른 가지. ‘폐업합니다’ 와 ‘임대 급구’ 스티커가 나란히 붙어 있는 유리창. 무대와 객석 사이를 채우던 함성과 박수 소리. 과거와 미래에 붙잡히지 않고 마구 내달리던 꼬마의 뜀박질.

비어 있는 줄 알았던 곳에 다가간다. 정수리에서 발가락 끝까지 척추를 따라 들숨과 날숨이 오가는 시간, 움직임이 일어난다. 움직이는 존재가 있고, 움직임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움직임이 있고, 물성을 가진 무언가가 목적에 따라 이동하는 순간, 물리적 공간이라는 개념은 시간과 기억을 품은 ‘장소’가 된다. 존재와 상태의 가능성만 지니고 있던 곳이 맥락을 띄게 되는 것이다.

춤이 발생하는 공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곳이 극장이든, 거리든, 무대든, 너른 벌판이든. 누군가가 춤을 추고 춤을 지켜보는 자의 움직임이 있다면, 춤이 발생한 공간에는 ‘장소성’이 탄생한다. 춤을 통해 서로에게 ‘공간’에 그치고 말았을 곳을 ‘장소’로 만드는 일. 그 일을 하는 이는 공간에 어떻게 감응하고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이 좁아지고 있는 요즘, 현대무용을 기반으로 국내외에서 활동해온 이선시 안무가를 만나 ‘춤과 공간’을 테마로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은 집에 오래 머무르게 되면서 시선이 바깥에서 나로 향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많은 변이가 일어난 것 같다. 우리에게 굉장한 일들이 있지 않았나. 이 시간을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며 버티는 사람들의 힘과 동시에 두려움도 느낀다.


이선시 안무가의 최근작은 지난 12월 발표한 <나를 관찰해줘 2020>이다. 본래의 집 구조를 살린 복합문화공간에서 진행되었는데 벽면, 모퉁이, 옥상, 계단, 바닥 등 공간을 다채롭게 활용한 움직임이 인상 깊었다.

공간적인 면에 있어서 본능에 충실한 편이다. ‘춤과 공간’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땐 그동안 ‘춤’과 ‘공간’을 나란히 두고 본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춤을 추는 내가 공간에 들어가는 입장이라 분리해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충동을 가장 먼저 믿고, 공간을 들어주고 이해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럴 때 공간 자체가 춤을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나를 관찰해줘 2020>



<나를 관찰해줘 2020>는 ‘보는 것과 관찰하는 것’의 차이에 주목한다. ‘보는 것은 고개 각도의 변화가 없어도 되지만 관찰을 위해서는 고개의 각도를 요리조리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을 텐데. 관찰을 통해 위로와 힘을 전하고 싶었다. 감추고 있는 쓸쓸함이나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있지 않나. 나를 알아주길 바라지만 동시에 또 알아주지 않기를 바라는 묘한 마음. 그러다 누군가에게 찔리면 풍선 터지듯 폭발하기도 하고. 어떻게 지혜롭게 풀어야 할까. 그 고민 끝에 관찰의 힘을 떠올렸다. 



관찰이라는 행위는 각도의 움직임, 시선의 방향에서 나아가 ‘어디에서’, 즉 어떤 위치와 자리에서 볼 것인가의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전에는 밖에 나가서 관찰을 많이 했는데, 상황 때문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생기면서 집 안을 관찰하게 된다. 이런 게 내 집에 있었나? 왜 그전에는 못 봤지? 보고 지나간 것은 때로 잊히기도 하는데, 관찰한 것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진가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측면에서 왜 관찰해야 할까. 의문을 가지고 리서치를 시작했다. 초기에는 코로나 19로 미디어가 주목받는 시대가 되면, 관찰이라는 능력이 결국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나를 관찰해줘 2020>



작품 리플렛에 실린 이선시 안무가의 소개 글 중에는 눈에 띄게 재미난 구절이 있다. 바로 본인의 치명적 단점과 춤의 경로를 설명하는 문단이다. 


“그에게 치명적 단점이 있다면 순서를 잘 외우지 못하고, 군무를 잘 맞추지 못한다는 부분인데, 이는 방향을 틀게 된 계기가 되어 (중략)” 

대학 무용과를 나왔는데 졸업하면서 교수님에게 떨어져 나왔다. 마치 어떤 느낌이냐면 대형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 독립하는 거랄까. 그때 설 수 있는 무대가 없었다. 춤을 계속 추고 싶었는데 춤출 수 있는 곳이 공연장이나 대극장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대기실도 없는 공간들이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서 공간을 살려야 했고, 그러다 보니 그 이후로도 그런 작업을 계속 만나게 되더라. 



연극영화과 지망생이었던 이선시 안무가는 남학생 정원 수를 맞추기 위해 무용과를 제안받으면서 춤을 시작했다. 춤은 나름대로 좋았지만, 학교는 잘 맞지 않았다. 남들과 똑같은 순서와 속도를 맞추거나, 빠르게 외워야 하는 안무는 잘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2014년 그리스 헬라스 국제무용콩쿨로 세계 1위의 영예를 쥐고 병역 특례를 받기도 했지만, 학교를 떠나니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지 않았다. 

콩쿨에서 아무리 훌륭한 이력이 있어도 자신의 춤을 추는 공간을 찾는 과정에서 많은 친구들이 사라진다. 먹고 살자, 다른 것도 해보자하면서. 무용과는 참 돈이 많이 든다. 레슨비, 의상비, 음악비, 등록비, 특강비, 해외연수. 내야 할 게 굉장히 많은데 그 돈을 들이고도 다양한 이유로 춤추지 못하는 이들을 주변에서 많이 봤다.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남성 무용수 나 1명 생존했다. 



학교와 전쟁을 치르고 힘들던 시기 우연히 이소영 안무가(몿진 인터뷰)의 공연을 보고, 찾아가 즉흥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새롭게 생겨나는 공간, 복합문화공간 등 재미있는 공간 들을 경험하면서 공간과 관계를 갖는 일도 많아졌다. 

많은 헤프닝이 있었지만, 즉흥 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바깥세상을 보게 됐다. 내 목소리를 찾고 제 갈 길을 가고 싶고. 다른 결의 안무가와 무용가를 보면서 공간에 대해 많이 배웠다. 내가 가진 것을 더 들여다보게 됐다. 너무 뻗어있던 몸이 수축되는 기분이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 소리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안무의 순서와 정해진 움직임의 연결 없이 추는 즉흥 춤은 맥락 없이 비어 있는 곳을 누군가 먼저 찾아내 자신만의 해석과 느낌을 소개하는 일 같다. 춤추는 몸이 공간과 감응하는 과정을 관객인 나는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함께 지켜보는 역할을 맡는다. 그 과정에서 무용가와 관객은 각자의 방식으로 공간을 ‘장소’로 흡수한다. 

<나를 관찰해줘 2020>

춤을 출 땐 공간과 나와 관객을 하나로 세계를 관통해야 한다. 연결됐다, 이런 느낌이 들 때 굉장한 희열감을 느낀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그럴 때 공연이 많이 망했다(웃음). 관객이 힘들어하고 있구나, 평가하고 있구나, 이런 것들까지 같이 느껴지니까. 관객을 쥐고 놓지 않는 힘이 필요하다. 관객이 나를 보기 전까지는 어디든 바라볼 수 있지만, 나를 본 이상 떠나지 못하게 하는 힘. 저 사람이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도록 내가 쥐고 있는 힘. 그런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앞선 소개 글의 다음 구절은 이렇게 이어진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미국, 스위스, 독일, 이태리 등을 다니며 접촉 즉흥춤, 컴포지션, 개념예술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다.” 


배움과 경험의 지리적 공간은 국외로도 확장되었다. 코로나 19 이전까지 싱가포르 무용단 아티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선시 안무가가 경험한 춤에 대한 태도는 언어권에 따라 달랐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영역, 비슷한 문화와 성향을 공유하는 세계에 따라 움직임의 질감도 달라졌다. 

언어는 환경의 영향을 받고 그게 분위기와 춤으로 나오는 것 같다. 물론 개개인의 특성은 다르겠지만, 거칠게 국가별로 보면 그 베이스가 강하다. 예를 들어 한국어권은 돌려 말하는 성향이 있어서 움직임을 눌러가며 간다면, 일본은 차곡차곡 쌓는 느낌이 있고. 프랑스어권은 뒤보다는 앞으로 파고 나가면서 퍼지는 느낌을 받고. 영어권 사람들은 잘하고 싫은 걸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성향이 직설적인 움직임으로 영향을 준다. 춤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태도와 방법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처럼 가는 느낌이 난다. 



한때 춤을 잠시 접고, 회사를 다닌 적도 있었다는 이선시 안무가는 모든 답변의 끝에 ‘언제 춤출지 모르니까’ 하며 말미를 부드럽고 정성스럽게 다듬었다. 마지막 질문으로 그 의미를 물었다. 

나이대별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춤이 완전히 달라지고. 때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때그때 감수성이 다르고 몸도 달라지는 것이 있고. 내가 내 춤을 지키고 있을지 모르겠다. 과거의 나는 되게 악바리 같은 느낌이 있었다. 하기 싫은 춤을 춰야 할 때도 있고. 하지만 지금은 이 춤은 언제 다시 출수 있을지 모르니까. 현재의 춤에 대해 후회를 갖지 말자. 최대한 즐기고 실수 없이 사람들에게 연결하고 싶다.




관념적으로 몸이 없는 공간, 공간이 없는 몸은 존재할 수 없다. 몸의 자리에 춤을 대입해본다. 춤이 없는 공간, 공간이 없는 춤은 존재할 수 없을까? 

춤꾼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우주라 해도. 바닷속이라도 해도. 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 사람의 얼굴이 때로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공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공간이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공간을 믿고 공간에 대한 대화를 지속할 것이다. 





진행|보코, 소영
기록|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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